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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내 몸 쓰며 하는 이사가 좋다



“이사하는 게 즐거워요. 2년마다 사는 환경을 바꿔보는 게 좋잖아요.”

“그건 정환씨가 아직 젊어서 그래요.”

6년 전 부모님 댁에서 나온 이후 네 번째 이사를 준비하며 어느 선배와 나눈 대화다. 어쩌면 선배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결혼을 안했으니 아이들 학교 걱정도 없고, 부인의 직장 고민도 없고 살림이 많지도 않다.

이사가 즐겁다.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내 취향에 맞게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분명 충분히 가슴 설레는 일이다. 


7월 26일. 한산면에서 5일장 취재를 하고 있는데, 명륜동 집 주인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 계약하러 온 사람이 있는데 어느 정도 말미를 주면 좋겠냐는 거였다. 나는 큰 생각 없이 8월 19일 정도로 하자고 했다. 3주후였다. 이는 3주안에 내가 새 집을 구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방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보자면 결코 여유 있는 기간은 아니지만, 별 걱정이 없었다. 뚜렷한 대책이 있진 않았지만, 막연하게 혹 그 기간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하면 아버지가 사시는 상계동으로 가면 된다 싶었다. 


명륜동 집이 계약 만기가 되면서 재계약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연스레 이사를 결심했다. 그때까지 어디로 이사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혼자 사시는 아파트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강했다. 그러면 술을 덜 드실까, 덜 외로우실까 싶은 마음에.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포기해 버렸다. 현실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결국 어딘가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2년 전 수유리에서 혜화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전세금에 맞는 집, 직장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할 수 있는 거리, 부모님 계시는 상계동과의 거리 등을 이사 갈 장소 선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2년 후인 지금 직장과의 거리를 주요한 기준 중 하나로 삼았다. 오히려 전세금이나 부모님과의 거리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렸다. 돈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혹 필요하다면 어머니에게 다시 빌릴 수도 있을 듯 했다. 부모님과의 거리는 마음과 달리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2년 동안 생활하면서 느꼈다. 결국 직장을 중심에 두고 보니, 서교동, 동교동, 합정동, 연남동, 창천동 일대를 물색하게 됐다.  


이번 이사는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방을 구하는 일은 7월 28일 토요일에 시작했다. 생활정보지를 모아서 장소와 전세값 등을 파악하고는 자전거를 타고 이사할 동네 근처를 돌았다. 

첫 번째 집은 신촌교회 근처 3층인데 일자형으로 거실을 가운데 두고 방이 두 개 였다. 그런 대로 나쁘진 않았는데, 길거리에서 가까워 차 소리가 들려 아득한 맛이 떨어졌다. 두 번째 집은 홍대역과 산울림소극장 중간쯤.  이 집 구경하고 졸도하는 줄 알았다.
 
6천3백만원이나 하는 전셋집인데, 원룸인데다 크기도 작을뿐더러 방 형태도 기형적이었다. 끝층이라 한쪽은 기울기가 있는 벽이고, 거실과 방이 눈대중으로라도 구분되지 않았다. 그 비싼 돈을 주고 왜 그런 집에서 살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 번째 집은 동교동 삼거리 근처. 3층 집인데 가격도 생각보다 낮고, 무엇보다 방이 깔끔하고 시원해 보였다. 벽 곳곳에 나 있는 물 샌 자국이 맘에 걸렸지만. 큰방 작은 방의 창문이 남향이고 근처 건물들이 용케 잘 비켜 주어서 햇살도 방안에 드는 구조였다. 


그 집을 보고는 맘이 끌렸다. 몇 가지 부정적인 조건과 변명을 동시에 떠올렸다. 벽에 물이 흐른 자국이 남은 것은 장마 때 비들이 벽 타기를 즐기는 집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너무 도심 가운데라는 점은 어차피 회사 근처라면 도심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집 자체의 조건들은 별 문제가 없었다. 회사와의 거리는 걸어서 15분 정도.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5~10분 정도였다. 뭐 그 정도면 딱이었다.


너무 쉽게 방을 구한 것 같아 오히려 괜한 걱정이 일었지만, 한 30분 정도 고민한 끝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계약을 하러갈 테니, 다른 사람을 받지 말라고. 부리나케 은행에 들러 300만원을 인출하고는 저녁에 계약했다. 계약하기 전에 집 주인에게 저당 잡힌 것 등을 물어보았다. 사실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전세 살다보면 걱정되는 것이니 이런 거 여쭤 본다고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양해를 구했다. 3,800만원 정도 은행빚이 있단다. 그러면서 아주머니 한 마디, “우리 아이가 저러고 있는데, 빚이 많으면 안되죠.”


방안을 돌아다니는 큰 아이가 정신지체장애아였다. 월요일 쯤에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보겠다고 하고는 계약을 했다. 등기부 등본을 확인해보니 구청에 압류된 건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 다시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니 세금을 내지 않은 거란다.

 

3주 동안. 먼저 이삿짐 나를 사람들을 구했다. 편한 학교 후배들 몇 명에게 연락했다. 두 명을 구했다. 이사 간단 얘기를 들은 현태가 이삿짐을 나르겠다고 했다. 요즘 흔히들 하는 포장이사도 있지만, 나는 그냥 내 몸 쓰면서 하는 이사가 좋다. 이참에 얼굴 못 본 사람들 얼굴도 보니 그도 즐거운 일이다. 이삿짐 차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나는 이사할 때 친구들 안 부른다.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다”고 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식사값을 따져보면 비용이 비슷하지만, 똑같은 돈이라도 쓰임이 다르면 그만큼 재미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구하고 나니 남은 것은 짐 싸는 일이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8할이 책이다. 그러니 박스만 마련하면 된다. 다행히 2년 전 이사올 때 사용했던 종이박스를 버리지 않고 보일러실에 두었는데, 꺼내보니 말짱했다. 약간 부족할 것 같긴 해서 이사 전날, 근처 과일가게에서 구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내심은 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은데. 결국 집에 들어가는 길에 과일을 사면서 박스를 세 개 얻었다. 짐은 전날 틈틈이 쌓았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이사 들어갈 집의 방 배치도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느렸다. 계약서를 쓰러가면서 줄자를 가져가 방이며 거실 등의 크기를 대략 쟀다. 그리고는 모눈종이에 도면을 그렸다. 그 후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침대, 책상, 옷걸이용 행거, 책상, 오디오, 이미 놓일 자리가 빤해 보이는 냉장고까지. 큰 방엔 무엇을 놓을까. 침대와 책상을 어떻게 배치하고, 책장은 어떻게 쌓을까. 작은 방의 용도는 옷을 보관하는 게 일차적인데 그와 어울릴 법한 게 무엇이 있을까. 처음으로 거실다운 거실을 가졌는데 거실은 어떻게 꾸밀까.


온전히 내 공간을 꾸민다는 것이 주는 묘한 맛이 충분히 내겐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 상상은 이번 이사 땐 많은 제약이 있었다. 다른 바쁜 일이 있어서 그 즐거운 상상이 자꾸 뒤로 밀렸다. 그럼에도 즐거운 일은 틈틈이 파고드는지라, 자기 전에 짬짬이 들여다보곤 했다.   

 

8월 19일. 이사는 12시 무렵에 순조롭게 끝났다. 밥솥 뚜껑이 깨진 것 말고 큰 사고는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점심을 먹은 후 돌려보냈다. 이제 남은 일은 나 혼자 차근차근 정리하는 것뿐이다.


이사 이주일이 지난 현재까지 책을 담은 박스 열 개 정도는 아직 풀지 못했다. 마감이 겹치면서 부득이하게 다음 주에나 풀 수 있을 것 같다. 큰 배치는 끝났다.

이사하기 한 달 전, 이전에 차단스라고 불린, 그러나 책상으로 쓰고 있던 가구를 버렸다. 책을 쌓아두던 건데 굳이 필요 있을까 싶어 버렸다. 그때 가구를 잘 분해해서 밑판 등 쓸 만한 나무판들은 따로 챙겨 두었다. 그런데 그게 이번에 크게 소용이 되었다. 시늉만 낸 작은 베란다가 있는데 그 한곳에 수납장을 만들었다. 나사못으로 앞 벽에 판을 고정하고 밑판으로 쓰이던 판자를 톱질해 판을 만들어 4단으로 만들었다. 아마추어가 만든 모양치고는 훌륭했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세탁기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의자, 밥솥도 필요할 것 같다. 밥솥은 5만원 주고 사서 6년 썼으니 그런대로 오래 썼다 싶다.

새로 이사온 집은… 곳곳이 창문이라 개인프라이버시가 유지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더울 땐 홀라당 벗고 있는 게 편한데, 주변 시선들이 만만치 않다. 대신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들고, 낮엔 햇살이 찾고 밤엔 달빛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나름대로 도심 안의 무릉도원으로 삼을 만하다.

짐 정리가 마무리된 9월 중순 이후 벗들을 초대해야겠다. (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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