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그 10년

공무도하가(1)

높새을이 2009. 9. 27. 18:40

물살은 흰날새(白首狂夫)의 허리를 휘감고 돌았다. 몸짓이 가람(江)가운데로 나아갈수록 아래쪽으로 금방이라도 휩쓸려 갈듯 휘청거렸다. 깨어진 칼날처럼 물살이 흩어지며 흰날새의 뺨에 박혔다. 하얀 머리까지 젖은 지 오래지만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손에 쥔 주둥이가 좁은 검은 그릇만은 물에 빠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겉은 모두 젖어 버렸고, 그릇 둘레에 뚫린 구멍에서도 물이 가끔씩 흘러나왔다.   
 

이른 아침 노프새(霍里子高)는 나룻터로 나섰다. 날이 더 추워지기 앞서 부서진 뗏나무통(舟)을 고쳐놓으려 했다. 쌀쌀한 새벽바람이 얇은 옷소매를 스쳤다. 발목은 풀잎에 내린 이슬에 젖어 버렸다. 노프새는 나룻터로 내려가는 길에서 물안개 사이로 드러나듯 나타났다가 지워지듯 사라지는 희미한 것이 가람 가운데 떠도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노프새는 이내 좀더 나룻가로 내려가 살펴보고는 그제서야 그것이 흰날새임을 알았다. 어른 돌팔매 거리쯤 되는 가람 폭에서 흰날새는 아직 가운데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너편에 있는 고닥나무(神木)로 가는 듯한 모습만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저렇게 되는구먼.’


해거름 녘이 되면 가끔씩 이 언덕을 찾던 노프새는 엿새 앞서도 이곳에 왔었다. 흰날새가 미리 와 해넘이서뫼(西山)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 밑으로 흐르는 가람에 떨구어진 노을 부스러기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며 꼭두서니빛을 일구었다. 또다른 빛 한줄기는 흰날새 앞에 놓인 흙빛 그릇에 부딪혀 변변히 빛도 내지 못하고 빨려들었다. 그릇 안에는 물이 반쯤 담겨 흙빛을 머금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흰날새 옆에 엉거주춤 앉던 노프새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짐승을 향해 날다 툭 떨어져버리는 돌멩이처럼 건네는 말의 뒤가 끊겼다. 

“어이--- ”

힘없이 되돌말(對答)을 한 흰날새는 그릇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서서히, 그러나 노프새가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정도로 오래 그릇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여설은 아직 찾지 못했나요”

노프새가 그 지루함을 깨뜨리듯 흰날새의 안해(妻) 여설의 얘기를 꺼냈다.

“어이, 아마도 잔돌긴남밭마을 남정네에게 간 듯 싶으이”

“아-- 예”


“지난번 큰물 질 때 그쪽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가 베. 가람이 얼어도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 보니. 그래 노프새는 어떤고? 그쪽도 먹고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흰날새는 해를 막 삼킨 해너미서뫼를 바라보며 말을 던졌다. 그러나 딱히 되돌말을 바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냥 가람에 띄우듯 입에서 말들이 그렇게 흘러 내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붉은 노을 속에서 더욱 또렷이 보였다.

“이대로는 살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 사냥할 힘도 없고, 그나마 물고기라도 잡아먹던 저 가람도 이제 곧 얼음이 내려앉을 것인데``` ```. 그래도 내는 거둘 사람이 없으니까 낫지요”


“이처럼 마을이 아픈 적는 없었지. 나 어릴 때 잔돌긴남밭마을에서 싸움을 걸어왔을 때도, 이러진 않았었지. 어린놈들이 눈만 멀뚱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저 눕지를 못하지. 할 수 없이 밤에 숲을 헤매곤 하지. 그때마다 지난번 마을굿(祭儀)이 말썽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 씀씀이가 모자랐던 거지”


마을굿이란 말을 듣자 노프새 머릿속엔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가 따라 올라오듯 지난 둥근달밤 언덕길이 떠올랐다. 마을굿이 열리기 하루 앞선 밤이라 머리카락이 두어 뼘은 자랄 만한 날이 지났건만 또렷이 그려졌다. (계속)

*. 꼭두서니 : 꼭두서니를 원료로 하여 만든 빨간 물감이나 그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