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그 10년

공무도하가(5)

높새을이 2009. 9. 26. 22:27
 

지난 번 마을 가운데 있는 하늘받이나무(神堂樹)에 새싹이 돋고 삼일 후 마을굿(祭儀)을 치를 때였다. 그때 흰날새는 바침인(祭物人)이라서 쌍돌머리뫼(石山)에 있는 움집에서 혼자 삼칠일간 지내야 했다. 움집 주위에는 에둘러 커다란 돌 세 개가 놓여 있어 세돌다지로 불렸다. 세돌다지는 마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라서 사냥을 하다가도 짐승이 이 근처로 도망가면 쫓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직 그곳엔 열두번의 둥근달을 볼 동안 한 번만 다가갈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침인이었다.


마을굿를 준비하는 사람은 깨끗해야 하기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안되었다. 혹여 다른 마을 사람들이 오더라도 들어올 수 없는 둘레임을 알 수 있게 움집 주위의 나무들 사이를 피풀줄기를 세줄로 늘어 엮었다.

“바침인은 이 마을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쌍돌머리뫼 꼭대기에서 어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해가 솟기 앞서 하늘을 섬겨야 한다. 지난해 큰물 진 일을 잊지 않았겠지. 올해도 큰 물이 진다면 마을은 물론 너도 위태로워진다. 여섯 번째의 둥든 달이 뜨면 바침인의 일은 모두 끝나게 된다. 그동안 누구도 만나서는 안된다.” 


세돌다지 움집으로 들어오기 앞서 마을웃어른(祭司長)이 흰날새에게 들려준 말들이었다.

마을굿을 하루 남겨 둔 날 밤, 흰날새는 두려움이 일었다. 여설과 오랫동안 헤어지는 일도 그렇지만, 이번 마을굿이 지난해의 큰물 진 일을 해결해야 했다. 자리에서 뒤척이던 흰날새는 가람으로 갔다. 몸을 씻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었다.


마음이 편치 못하기엔 여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흰날새를 세돌다지로 떠나 보낼 때부터 여설은 아비의 죽음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못된 생각들이 자꾸 흰날새와 겹쳐 일었다.

여설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바장이었다. 하늘받이나무(神堂樹)는 그림자를 짧게 오므리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가를 바라보다 가람으로 향했다. 멀리서나마 흰날새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니 움집이라도 보면 나을 듯 싶었다. 마음이 발길을 재촉하는지, 발길이 마음을 끄는지 모르게 한참을 걷던 여설은 고닥나무(神木)를 보고서야 가람가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고닥나무에서 가람기슭으로 서서히 눈길이 좁혀지던 여설은 갑자기 발걸음이 멎었다.


“아---”

짧은 소리가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여설의 앞에는 어느새 왔는지 흰날새가 서 있었다.  달빛이 흰날새의 흰 머리카락에 부서져 곧장 여설의 눈을 스쳤지만, 여설 앞에 선 사람이 흰날새라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돌다지에서 버스러진 흰날새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떻게--- ”


그러나 여설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바람이 몰아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눈이 흰날새의 얼굴에 묶인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달빛을 곧바로 받아 빛나는 흰날새의 눈빛에 헤어졌던 지난 날들이 순간처럼 지나쳤다. 그동안 부푼 두려움이 가슴속을 마구 휘돌았다.

여설은 바짝 다가서며 흰날새의 어깨를 잡았다. 가슴이 움츠려 들며 손끝이 잘게 떨었다. 작은 어깨는 어느새 흰날새의 가슴안에 곱게 포개여 있었다. 떨어져 있던 삼칠일 동안이 헤아릴 수 없이 길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언제나 만났던 맺음이(夫婦)들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미 여설과 흰날새는 더 이상 제 정신을 헤아리지 못했다. 흰날새가 바침인의 몸이란 사실은 둘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설을 껴안고 있던 흰날새의 손은 어느새 여설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흰날새의 손이 차츰 여설의 몸 아래를 더듬을 때, 마을쪽 숲속에서 빛나던 두 눈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잠시 후 그 그림자는 마을 쪽 길로 달음질쳤다. 그림자에 치인 잎사귀들이 달빛을 마구 털어 냈다.(계속)
 

*. 바장이다 : 짧은 거리를 부질없이 오락가락함.  *. 버스러진 : 어떤 범위에서 벗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