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가(7)
“조금만 더 참아보도록 하자. 어린 아이들부터 먹을거리를 주고 어른들은 사낭을 다시 준비하자”
“그러나 이제 사낭할 만한 곳도 없지요.”
도리암직한 사내가 마을어른의 말을 받았다. 하늘받이나무(神堂樹) 둘레로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계속했으나 굶주림에 대한 마땅한 풀이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지에 걸쳐 있었던 그림자가 이미 가람(江)쪽으로 난 숲속으로 길게 늘어서고 있었다. 얘기는 계속 되풀이되었다. 어른들은 다시 한 번 마을굿(祭儀)을 준비하지는 얘기를 많이 했다. 울가망한 마을웃어른(祭司長)은 별다른 얘기없이 듣고만 있었다. 흰날새(白首狂夫)는 나뭇가지를 꺾어 땅을 긁었다.
‘마을굿 얘기를 해야 하는가’
땅에 머리를 박은 나뭇가지는 깊이 흙을 도려내었다. 이어진 선들은 죽음나무뫼를 닮아갔다.
‘아니다. 지금은 굶주림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뒤에 얘기를 해도 늦지 않다. 굶주림을 벗어나려면 아무래도 그곳 밖에는 없다.’
흰날새는 이미 귀틀무덤에 누어버린 흰날새의 아비가, 흰날새가 맺음동굴에서 나온 후에 들려준 얘기를 떠올렸다.
“언젠가 죽음나무뫼너머마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 마을은 우리네와 놀이, 입거리에서 많이 다르더구나. 그 마을의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웃사람(호민)이라는 이들은 일을 하지 않고, 대신 아랫사람들(하호)이 그들의 심부름과 일을 대신 도맡아 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언젠가 큰물이 졌을 때 그쪽에서 아랫사람으로 살던 사람이 떠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사람에게 들은 얘기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너무 많은 힘이 빠져서 가람기슭에서 발견된 지 이틀만에 죽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마을에서는 그 마을을 꺼리게 되었지. 함께 사냥을 해서 먹고사는 우리들하고 다르게 사는 점이 낯설기도 했고, 또 낯설기 때문에 적지 않은 두려움도 있었지. 하지만, 그 마을이 우리 마을보다 힘이 센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때 아랫사람이 가져온 쇠붙이라는 것은 우리의 푸른구리(靑銅)칼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웠거든. ”
흰날새는 그때 그 얘기를 또박또박 기억해 두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밟지 않은 땅이 있다는 점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그런 생각들도 마음 한쪽 벽에 붙어 굳어 버린 듯 움직임이 없었다.
그 생각이 다시 꿈틀거린 때는 이미 몇 번의 마을모임을 가지면서부터 였다. 뚜렷한 풀이를 찾지 못하고 되풀이되는 얘기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을 때, 흰날새는 그 마을이라면 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풀이를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잔돌긴남밭마을은 마을웃어른이 찾아갔으나, 옛날 싸웠던 속들이 남아 마을을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싸움을 하자고 해도 힘이 모자랐다.
흰날새가 땅에 죽음나무뫼와 가람을 모두 그릴 쯤에 마을모임은 끝났다. 이번 모임 역시 헛되이 그림자만 쫓다 보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굳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 머릿속의 양끝은 마을굿과 죽음나무너머마을로 팽팽하게 연결돼 있었다. 마을굿은 지난 번 큰물이 진 이후 줄곧 생각 한쪽에 매여 있었지만, 죽음나무뫼너머마을은 요 며칠 사이에 불쑥 불거져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늦게 들어앉은 죽음나무뫼너머마을에 대한 생각은 더욱 쑥쑥 자라났다. 더욱이 마을어른들과 생각이 엇갈리면서 더욱 단단히 굳어지고 있었다.(계속)
*. 도리암직하다 : 키가 좀 작고 얼굴이 나부죽하며 몸맵시가 있다.
*. 울가망하다 : 근심스럽거나 울울하여 기분이 편안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