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가을향
장 취재를 마치고 수요일 아침 출근해 보니 사무실 책상위에 택배로 온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처음엔 소포인 줄 못 알아보고 이게 뭘까 하다가 보낸 이의 이름을 읽고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보낸 지 알고 나니 이번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내게 조금 더 궁금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뜯는 것을 잠시 미뤄 두었다. 어떤 물건이 들었을지 많이 상상하라고.
이 인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취재로 이틀간 비운 사이 쌓인 일들을 대충 정리하고는 냉큼 포장지를 뜯었다. 소포를 뜯기 전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던 물건은 호두였다. 백여 개는 넘을 듯한 호두가 종이 상자 안에 가득했다. 아하! 이게 지리산에서 자란 호두구나!
지난달 보길도에서 만난, 지리산 자락인 마천에 사는 안신정 누나가 보내온 것이었다. 그때 보길도에서 돌아온 후, ‘걸어다니는 책’ 네 번째 독자로 안신정 누나를 택해 <비노바바베>를 보냈다. 그 우편물에 세풀 9월호와 10월호를 함께 동봉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난 후 안신정 누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편물 잘 받았다는 말과 함께 세풀에 대한 짤막한 ‘창찬’도 곁들었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이 물건을 보내 준 것이다.
시월. 세풀 6주년을 기념이라도 하듯 많은 읽새들로부터 예상 못한 선물을 받았다. 다들 그동안 구독료 없이 받아보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선물을 받고 나니 보낸 마음이 고맙고, 준비한 정성이 고마워 절로 내 마음이 즐거워졌다.
지리산에서 온 호두를 확인하고는 <작은이야기> 팀들에게 호두를 두 알씩 나눠 주려 했다. 종이상자를 이리저리 흔들어보니, 아! 그 안엔 엽서와 또 다른 선물이 들어 있었다.
“ … 무엇보다 진솔한 삶의 얘기를 나누시는 ‘세풀’에 마음깊이 존경심이 우러나와 많은(?) 자극이 되어 잘(?) 살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이곳의 단풍들도 나날이 짙어가고,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하며 새로운 삶의 시작을 향한 겸허한 축제행진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 것 같습니다.무엇보다 건강을 돌보길 빌며... 행복한 시간을 갈무리하시길 빌며 마음이 따뜻한 노정환님께 지리산의 秋香을 함께 동봉합니다. ”
‘지리산의 秋香’은 다름 아닌 황국화다. 황국화 송이는 조그만 투명 약병에 담겼는데, 밥알만한 크
‘지리산의 秋香’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예뻐서 자주 타 마시지 못했다. 간혹 궁금하거나 왠지 우아해지고 싶으면 두어 송이 꺼내곤 했다. 향이 진해 두어 송이로도 차 한 잔으로 충분했다. 뜨거운 물에 넣고 조금 지나면 말려 있던 꽃송이들이 물위에서 활짝 피우는데 그 모습 또한 마치 생화를 보는 듯해 컵 안에 한 세상이 열린 듯 아름다웠다.
노을이 : 너 한 송이,
이 잔에 잠기니
가을 지리산이 가득 하구나
지금쯤 지리산은 얼마나 쓸쓸할까?
이처럼 큰
네가 떠나버린 품안이 얼마나 허전할까?
황국화 : 지리산은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않지요
지금 이 잔에 지리산이 가득하듯
이 차를 마시면, 당신의 몸 안에도 가을 지리산이 가득할 텐데요!
뿐인가요?
내 향이 당신의 몸을 돌면
당신의 마음자락에도 곧 지리산의 가을이 내려앉겠지요
그러니
지리산은 나를 보냄으로써 더욱 풍성해지고 알차진 거지요
저는 지리산의 일부이지만
이제는
당신 안에 담긴 지리산의 전부입니다
지리산 선물을 받기 약 일주일 전엔 난데없이 책 한 권이 배달되었다. <할아버지>(지호 펴냄)라는 책이었는데 그 안에 담긴 엽서엔 보낸 이의 마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노을이 <세상풀이> 일흔한 번째 잘 읽었어요. 동안에 정신없어서 제대로 읽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느긋하게 읽었네요. …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손이 부끄러웠는데, 이제야 숨 한번 돌리겠네요. 어쭙잖지만 좋은 책이어서 드리고 싶었어요.”
96년 자유기고가반을 함께 수강했던 영미 선배가 보내온 선물이었다. <할아버지>는 “세상의 평화와 자연의 진리를 찾아 헤맨 한 인디언의 일생”을 다룬 책이다. 대학원에 다니는 영미 선배가 번역한 책이었다. 책을 받고는 기쁜 마음에 영미 선배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 노을이입니다.
“아니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요?
- 그거야 제가 밥 먹고 하는 일이 그런 일인데요, 뭐. 선물 잘 받았습니다. 책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빨리 도착했네요?
잠시 수다를 떨고, 사는 곳이 회사에서 멀지 않으니 언제 한번 점심하자는 약속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 “핸드폰 번호는 출판사에 문의해서 알아냈어요” 라고 무척 궁금해 하던 비밀(?)을 알려주고 끊었다. 96년의 인연과 그동안 별 만남도, 연락이 없었어도 이처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렇게 불쑥 책 한 권을 보내 준 마음도 좋았고.
선물은 꼭 물건만으로 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이메일을 열어보니 긴 장문의 글이 들어와 있었다.
“… 가을 하늘을 보면서 노을씨를 떠올립니다. 제 책꽂이에는 <세상풀이> 파일북이 있습니다. 거실을 제 일터로 활용하고 있는 관계로 책꽂이는 거실 가장 좋은 자리에 잡고 있지요. 거기서도 <세상풀이> 파일은 소파에 앉으면 시선이 바로 가는 목좋은 곳에 자리 잡은 고로 드나드는 손님마다 ‘저게 뭐냐’합니다. 전략이지요. 그냥, '꺼내보세요"라는 말로 답합니다.
손님들은 대개 차를 마시면서도 펼쳐 보고 있는 <세상풀이>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게 <세상풀이>가 가진 힘일 것입니다. 참 상식선에서 왔다갔다 할 것 같은... 제도권 교육에 충실하고 사회에서도 표준의 삶에 잘 적응할 것 같은... 그래서 나 같은 다소 아웃사이더와는 몇 마디 나누면 그 다음 나눌거리가 딱 떨어져 둘이서는 대화를 5분도 이어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같아 보였어요. 노을씨의 처음 이미지가 그랬습니다.
<세상풀이>를 읽으면서, 노을이로 분한 정환씨를 알아 가면서, 한 사람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뜨리는 이'는 전에도 후에도 아마 만날 수 없을 듯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풀이는 절 아주 조금씩 바꾸어 갔습니다. 느낄 수 있지요.”
역시 96년 한겨레 자기반에서 만났던 미경 선배가 10월 중순에 보낸 이메일이다. 훗날 미경 선배도 유형의 선물을 꺼냈다. 10월의 마지막 날, 몇 년 만에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미경선배는 헝가리의 산도르 마라이가 쓴 ‘열정’이라는 책을 꺼내 놓았다.
이쯤만 되었어도, 이 정도로 내게 온 선물들이 그쳤어도, 굳이 세풀 10월호에 이런 낯간지러운 선물 이야기를 굳이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시월의 마지막 날, 택배 물건이 한 개 배달되었다. 물건을 뜯어보니 스웨터 였다. 보령에 사는 <작은이야기> 지역통신원 이경주님이 보낸 선물이었다. 아! 이거였군. 이 선물이 배달되던 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 이메일을 열어보니 이경주님이 보낸 이메일이 와 있었다. <세상풀이>를 한 1년 정도 보았는데 늘 빚만 지는 것 같다며, 마침 9월호에 생일 이야기가 있기에 선물을 골랐다는 것이다.
불숙 불쑥 받은 선물을 찬찬히 살피다시 다시 선물의 의미를 새롭게 느꼈다. 이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며,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는 거며, 선물을 골라 보내기까지의 ‘사소한’ 행위들이며, 선물에 동봉하기 위해 한두 글자 적는 고심까지…. 그런 과정만큼은, 그런 순간만큼은 선물을 보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가 살다 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처럼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은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터이니 - 의무적으로 마련한 선물은 아닐 터이니, 이를테면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인데 주어야 하는 생일선물 같은 것 말이다. - 그동안 내 마음은 그 사람의 긍정적 에너지를 듬뿍 받았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일까. 갑자기 삶이 신나고 재미있어 졌다. 그저 매달 내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것뿐인데, 그리고 독자 한 사람에게 약 1,000원 정도의 비용을 들이는 것뿐인데, 오히려 그 바쁜 일상들 속에서 내 글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내 준 것이 고마운 일인데, 이처럼 서로들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위해 잠시나마 마음을 써 준 ‘또다른 세상’들이 적지 않았다니 말이다. 이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행위와 무엇이 다를까.
그런 생각의 꼬리 꼬리는 다시 내게 돌아왔다. 남들도 잠시나마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데, 나는 나를 좀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자기 해석의 복제 과정과 의미 부풀리기를 통해, 나는 서른 두 살의 시월 중 며칠을 내 생에서 무척 즐거웠던 나날들 중의 하루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20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