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새, 섬진 봄길을 가다④
861번 도로는 구례읍에서 구례군 문척면으로 들어서기 위해 섬진을 넘는다. 제번 긴 다리를 건너고 나면 비로소 새 길이 시작된다. 861번 도로는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 인긍에서 출발해 지리산 성삼재를 올랐다가 광양시 진월면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구례를 사이에 두고 남원쪽으로는 지리산을 넘고, 광양쪽으로는 섬진을 따라 이어진다. 그 길의 반쪽을 달리게 되었다.
가을 단풍을 달고 있던 벚나무들은 언뜻 보아선 잎을 모두 떨군 겨울나무였다. 그러나 다가가보면 이제 곧 터질 꽃망울을 담고 있었다. 겨울을 이기는 봄을 발견하는 일은 섬진에선 어렵지 않았
섬진과 봄의 만남은 화개장터에서 잠시 멈췄다. 첫날의 일정은 거기에서 접었다. 오후 5시 30분쯤 되었다. 애초엔 5킬로를 더 가야하는 쌍계사가 목적지였지만 거기서 멈추었다. 벚꽃이 피기전엔 쌍계사 길을 달리는 거라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더욱이 바람까지 거셌다. 빠진 힘을 보충할 겸, 삽겹살로 저녁을 먹었다.
그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서쪽 강가 861번 도로를 따라 자리잡은 마을마다 매화꽃으로 둘러쌓였다. 비탈자락에 있는 집들은 매화꽃밭에서 존재를 잃은 듯 했다. 861번 도로를 달렸다면 너무 가깝고 비탈이라 볼 수 없을 풍경이었다. 종종 섬진과 바짝 붙은 구간에서는 섬진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유속이 빠르지 않아 곳곳에 모래톱을 이룬 섬진, 물가를 나는 새들을 거느린 섬진까지 아침 기운을 돋아냈다.
길 이정표에서는 뜻하지 않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동네다. 이정표를 보니 2킬로만 가면 최참판댁이 나온단다. 20여 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다. 그곳으로 높새를 돌렸다. 가던 길에 들판에 선 소나무 두 그루에 눈이 갔다. 무넘이들판의 부부송이라 불리는 소나무다.
어느 지역을 보면 살만 하겠다 싶은 곳이 있는데, 평사리도 그래 보였다. 전망이 탁 트여 있으면서도 멀리로 산을 둔 게 풍채까지 갖췄다. 비옥한 토지가 그 사이를 메우고 있으니 배부를 조건은 갖춘 셈이다. 이곳이 사람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는 이제 사람의 손에 결정된다. 그 손의 주인이 분배에 관심이 있는지 착복에 관심이 있는지가 지리적 조건을 바꾸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