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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그 10년

공무도하가(9)

 

여설은 지난 마을굿(祭儀) 앞날밤 흰날새(白首狂夫)를 만났던 언덕을 올랐다. 건너편 둑에 난 어린 고닥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것과 함께 가람안쪽에 있는 흰날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결은 이미 흰날새의 목 근처에서 살매를 품고 출렁이고 있었다.

“흰날새, 안 돼”


여설은 몸을 구르듯 언덕을 내려갔다. 심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마구 뛰었다.

“흰날새, 흰날새, 가지 마오”

흰날새는 머리를 때리는 물살 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여설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가람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멀어 보였다. 죽음나무뫼(東山)너머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했어야 했다.

‘달리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가람기슭에서 멀어질수록 몸은 나아가기보다는 가라앉고 있었다. 되돌아갔다가 다음을 기약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가지 마오. 그곳이 아니라도 살 수는 있을 거예요.”

‘아니야. 내가 가야해.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 죽게 될 거야. 내가 하늘을 노하게 해서 마을이 굶주리니까 내가 방법을 찾아야 해’


“흰날새, 돌아와. 흰날새”

‘여설, 돌아가. 난 건너갈 거야. 혹여 건너다 내 몸이 이곳에 버려진다면, 어쩌면 하늘이 노여움을 풀어 줄지도 몰라.’

흰날새의 흰 머리칼이 물결과 함께 일렁이던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햇살은 기슭에서 서성이더니 어느새 머리를 높이 들어 길게 빛을 몰고 마을로 향했다. 이미 사람들이 다녀가고 난 뒤라 길은 한층 쓸쓸해 보였다. 노프새(霍里子高)는 말없이 가람기슭에 앉아 여설이 빠져들어간 자리에다 조개를 쌓았다. 여설이 빠져든 후 해가 죽음나무뫼위로 두 뼘 가량 솟아 올랐지만, 노프새는 말이 없었다.


뗏나무통(舟) 근처에서 노프새가 흰날새를 보았을 때, 어쩌면 말렸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심 흰날새가 가람을 건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여설이 나타났고, 흰날새를 떠나보낸 후 여설은 맥없이 앉아있더니 곧 물속으로 우벅주벅 뛰어 들었다. 허리까지 차 오르는 물에도 아랑곳없이 흰날새가 사라진 곳을 향해 나아갔다. 잠겨 가는 몸과는 달리 흰날새를 부르는 목소리는 오히려 하늘로 치솟았으나, 이내 곧 흰날새가 사라진 그 어디쯤에서 여설도 잠겨버렸다. 


둘을 한꺼번에 삼켜버린 가람이 미안스러웠는지 물안개가 걷히기 걷었다. 조개무지가 조금씩 쌓여 앉아있는 노프새의 무릎께쯤 왔을 때 어디선가 가락통판(箜篌)가락이 들여왔다. 연이어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가락통판 가락을 넘나들며 가람기슭을 헤매였다.


“님----하 님--하 그- 물-----을- 건-너-지- 마소-”

그러나 감히 가람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온 노랫소리는 노프새의 귓전을 에워쌓다. 그것도 잠시, 뒷따르는 노랫소리에 밀려 앞서 흘렀던 노래는 조개무지로 힘없이 떨어졌다.


“님----은- 기----어---이- 물----속으로- 들어---가-셨-군-요”

가락통판를 타는 손길이 느린 만큼 진한 애처로움을 빚어내더니, 이제는 애처로움에 취해 손길이 느려지고 있었다.


“오--오---님----은 이미-- 물----에 빠-져- 죽---으--셨-네-”

처음에 노랫가락을 끌던 가락통판소리가 차츰 노래를 더할수록 노래소리에 밀려, 이제는 노랫가락이 가락통판줄의 울림을 이끌고 흘렀다. 노래가 느려지면 가락통판도 하염없이 쉬겠다는 듯 느려지면서도 잔잔한 떨림을 잊지 앉았다.


“오- 님---이여. 이내-- 몸----은- 어----이한단 말--인--가---. 어이한단--- 말-- 인-- 가-”

어느새 노프새가 쌓아놓은 조개무지보다 많은 노랫말들이 흘렀다. 조개무지에 때아닌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 물방울에 젖은 노랫가락은 더욱 낮게 기슭을 헤매었다. (끝)


*. 살매 : 사람이나 물건을 해치는 독하고 모진 귀신의 독기

*. 우벅주벅 : 거침없이 나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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