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신고가 그렇게 수월한 줄은 몰랐다. 우선 결혼 당사자 중 한 명만 해당 구청에 가면 된다. 상대방 배우자의 도장과 호주, 본적지 등 간단한 가족관계를 기록하고는, 보증인 두 명의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그것으로 법적인 부부관계가 성립한다.
그 간단한 혼인신고가 내겐 무척 어려웠다. 그 절차를 처음 겪어서 서툴러 생긴 불편함이야 그렇다 해도, 도장을 찍으러 가기까지 어머니가 벌인 묘한 신경전에 나 역시 마음이 상했다.
부모님께서 재혼신고를 하던 날, 아버지는 간신히 밖으로 나다닐 정도는 된다고 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외출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는 게 어떤가 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럴 경우 중화동에 사는 누나가 보증을 서려고 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상계동에서 가까운 중화동에 산다는 이유로 보증인으로 선택된 둘째 누나는 부업 때문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증인 부탁을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여오던 둘째 누나의 목소리 역시 그렇게 흔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으로 온 어머니는 내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집에 남고 어머니와 노원구청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와 함께 부모님의 재혼에 보증을 설 둘째 누나를 만났다.
“늙은 애 둘을 키우려니까 이리저리 고생을 하그만.”
나는 누나를 보자 씁쓸한 농담을 한 마디 던졌다. 가능하면 내 손에서 처리하고 싶었는데 다시금 손을 빌리는 게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청 근처에서 만난 누나는 기분이 조금 풀린 듯했다. 누나는 뼈가 쑤신다는 어머니에게 준다며 약을 가지고 왔다.
구청에서의 재혼신고, 아니 혼인신고는 그 신고를 하러 오던 길에서 흘려보내던 이런저런 감정들에 비하면 무척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약 1년 여 동안 이혼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법적 부부가 되었다.
재혼이란 말을 처음 꺼낸 이는 이혼하자는 말을 처음 꺼냈던 어머니였다.
지난 가을,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처음엔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는 병원을 찾으셨다. - 아버지의 병명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퇴원 당시 의사는 퇴원은 안 된다며, 내게 서약서까지 요구했지만, 퇴원 후 아버지는 더 나아 지셨다. - 어머니는 며칠 아버지의 병상 옆에서 간이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고는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시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 손을 꼭 잡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단다. 몸은 어떠냐, 어디에 빚진 것은 없느냐 등등 그야말로 임종을 앞둔 이를 대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그때 나누신 거였다. 그러면서 어머니도 우셨단다.
“그동안 내 속 많이 썩혔지만, 저러고 누워 있으니까 인간이 불쌍흐더라.‘
그러나 그 화해가 재혼으로 곧장 이어지진 않았다. 어머니의 재혼은 단 돈 1원이라도 가진 재산을 아들인 내게 주기 위한 법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이혼한 후 어머니의 호적은 외가댁으로 옮겨졌다. 외가댁이라고 해서 달리 든든한 호적붙이를 할 만한 이가 없었다. 결국, 외삼촌의 큰아들이 어머니의 호주로 들어앉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때부터 불안불안 했다. 1원이든 10원이든 당신의 땀이 베인 돈이 다른 사람에게 상속된다는 것이, 당신의 ‘아들’에게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야말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런 차에 아버지가 암이라니 그렇게 병원에 누워 있다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호적을 복구할 길이 영원히 없다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밉기는 하지만, 다시 재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셨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내게 그런 일을 상의하셨고, 나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당신의 병명을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재혼에 대해선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혼 신고를 앞두고 두 분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버지가 입원에 계시던 때에 우연찮게 아버지 통장을 본 큰 누나가 두어 달 사이에 아버지 통장에서 비교적 많은 액수의 돈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머니에게 얘기했다. 어머니는 이전부터 아버지가 술값으로 돈을 쓴다는 혐의를 두고 있는지라, 누나의 이 말에 곧장 애증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 몇 달 간 빠져나간 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술값이라고 판단했다.
그 술값에는 이른바 술집 여자들에게 쓴 돈도 있을 것이라는 덧붙이기까지 했다. 다시 두 분 사이는 입원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퇴원 후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최소한의 일만 - 김치를 갖다 주고, 마실 약수물을 길러다 주는 - 했다. 비록 재혼 신고를 했지만 상황이 그러하니 마음은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다.
재혼 신고 후, 나는 여전히 따로 살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 제안은 어머니가 먼저 거부했다. 누나들 또한 함께 살면 어머니가 불안해서 못 산다고 만류했다.
부모님의 재혼 후 나는 내 건강보험증 안에 부모님의 이름을 넣었다. 딱 그 정도가 내 역할일 뿐이었다. (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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