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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온날

눈이 내리면 길은 다시 시작된다



다시 광주에 눈이 내린 1월 13일, 강진으로 출장을 나섰다. 두 명이 관용차량을 타고 떠나기로 한 출장을 도로사정을 염려해,  뚜벅이족인 나 혼자 대중교통으로 떠났다. 간밤에 내린 눈 덕에 얻은 호젓한 출장길이다. 광주시내를 벗어나 나주, 영산포, 영암, 성전을 거쳐 강진으로 가는 길. 버스 맨 앞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꺼냈다. 


1.

눈 내리는 그 도로에서도 눈에 남는 건 사람이었다. 
어젯밤 내린 눈이 쌓이고, 다시 내리는 눈 사이로 도로를 따라 한 촌부가 길을 나섰다.   
눈이 내리면 길은 다시 시작된다. 
차가 달리는 길이 도로이고, 사람이 걷는 길이 인도다.
경계가 가려져 위험한 길이고, 경계가 허물어져 자유로운 길이다.
그럼에도 자유보다 위험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경계만을 의존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2.

100분 남짓한 그 길에도 눈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광주를 벗어나 나주로 향하는 도로. 편도 2차선 도로가 그대로 살아있다. 주변에 눈이 있지만, 비 내린 도로 같다.

영산포를 벗어나 영암으로 가는 길,  편도 2차선 도로엔 네 줄의 타이어 자국으로 길이 나 있다.
영암을 지나 강진으로 가는 고갯길, 도로는 편도 1차선만 열렸다. 바깥 차선은 눈으로 덮여있다. 
고지대인 곳,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눈은 많은 도로를 덮고 있다. 
눈과 도로의 표정들을 보며
, 해가 왜 태양(太陽) 인지 알겠다. 


3.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날씨 이야기를 하며 이번 눈을 '폭설(暴雪)'이라 한다. 
옳지 않는 말이다.

남도의 눈은 거침없이 내리지만 폭력적이지 않다. 햇살이 내리면 누구보다 곱게 녹아 내린다.
'폭설暴雪'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비록 사전엔 없지만, 만설滿雪이나 다설多雪이어야,  일면의 가치중립성을 얻는다. 
 

4.
"강진은 날씨보다 마음이 더 따뜻한 고장입니다."
영암을 지나 강진군의 경계를 넘는 곳에 아치형 설치물에 쓰인 글귀다. 

눈 내리는 날, 마음에 찰싹 달라붙는 문구다. 
곰곰이 생각하면 눈 내리는 상황과 맞지 않지만  환경이 착각을 만든다.  날씨와 마음을 따뜻함의 깊이로 비교하자면, 따뜻한 날씨여야 맞다. 
그럼에도 이런 추운 날씨일수록 이 글귀는 제 역할을  더 잘한다.


카메라가 붙잡은 것은 풍경이 아니라 생각이다.  하긴 영화든, 책이든, 그림이든,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생각을 붙잡는다. (201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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