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지하철’
지난 해 봄, 처음 광주지하철을 탔을 때 차내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의 이 단어가 낯설었다. 인권과 지하철의 만남이 조금은 어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개월 정도 흐른 2010년. 누군가 광주지하철의 그 방송을 듣고 아리송해 한다면 이제는 설명이 가능할 듯 싶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인권테마역사로 시작된다. 단지 시설물이나 인테리어가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인권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얘기로 말이다.
2008년 11월 광주지하철 김대중컨벤션센터역이 인권테마역사로 거듭났다. 광주인권사무소와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도시철도공사가 함께 모여 인권을 주제로 한 역사를 만들자는 뜻을 모아 이뤄낸 공간이었다. 인권테마역사는 지하 1층 역무실 주변 공간을 각종 인권 관련 콘텐츠와 형상물로 인테리어 했다. 벽화, 터치스크린, 무등의 벽, 시민참여 공연 공간 등 역사 곳곳에 이야기를 담았다.
문제는 시민들의 관심이다. 콘텐츠를 잘 조성했더라도 정작 시민들의 발길이 머물지 않으면 단순한 장식품일 뿐이다. 인권테마역사의 생동은 2009년 봄부터 시작됐다. 광주인권사무소는 인권테마역사에서 인권현장 방문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프로그램엔 초․중․고등 학생들과 어린이집 아이들까지 다양하게 참여했다. 멀리 강진과 정읍에 사는 학생들도 인권테마역사를 방문했다.
벽에 전시된 각종 콘텐츠에 설명이 곁들여지면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권위가 만든 인권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볼 때면 눈망울이 좀더 또렷해졌다. (사)실로암사람들은 장애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거리를 좁혔다. 교육이 열릴 때마다 역 직원들의 크고 작은 도움도 이어졌다.
방문프로그램은 인권테마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었다. 테마역사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이 비로소 말벗을 만난 기회였다. 학생들이 짧은 두어 시간 동안 무엇을 많이 배워가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권테마역사에서 ‘인권’이라는 글자와 만난 기억은 장소의 독특함이 있어 지워지지 않을 듯싶다.
올해는 인권테마역사로부터 시작된 인권지하철이 한 단계 더 진화한다. 인권지하철의 두 번째 이야기다. 지난해 12월 18일 인권테마열차가 운행됐다. 인권테마열차는 인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콘텐츠가 지하철 내부 광고판을 채운 열차로, 광주인권사무소와 강진군, 광주도시철도공사가 함께 추진했다. 인권테마열차는 하루 12회 정도 운영하는데, 인권콘텐츠는 2번, 3번 차량에 전시돼 있다.
인권테마열차는 상업적 광고로만 활용될 수 있는 열차 내부 광고판을 인권콘텐츠로 채워, 공공성을 높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여기에 인권테마열차에 게재된 다양한 콘텐츠는 수많은 인권이야기를 담고 달리는 열차를 가능하게 했다.
인권테마열차에는 우선 강진군에 사는 이주여성들의 다양한 삶이 짧은 글들로 표현돼 있다. 단순한 친목회가 아닌, 훗날 다문화가정을 이룰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임을 운영하는 김행천씨, 동네 어르신들에게 책도 읽어주고 한문도 가르쳐 주는 중국에서 온 조림걸씨, 외국어타운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필리핀에서 온 올리바 씨 등의 삶이 담겨 있다.
또한 강진군의 초․중․고등 학생들이 각자 ‘인권은 무엇이다’고 정의한 인권느낌표도 게시돼 있다. 강진대구중학교의 박우정군은 ‘인권은 옷이다’고 정의했는데, 그 이유는 ‘항상 곁에 있지만 꼭 필요한 것이 옷인데, 인권이 마찬가지라’라는 것. 이 밖에도 이주여성들이 직접 자국어와 한국어로 쓴 세계인권조약, 인권위가 그동안 권고한 차별사건들을 한두 문장으로 깔끔히 정리해 인권포스터와 함께 배치한 콘텐츠 등이 전시돼 있다.
인권지하철은 인권테마역사와 테마열차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안전성도 중요하고, 장애인, 노인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정비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인권테마역사와 인권테마열차에 실린 이야기들은 이제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마음에 인권이라는 글자와 함께 슬며시 내려앉을 것이다. 그것이 당장 무엇을 크게 바꾸지 않더라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이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는 감성’, 즉 인권감수성을 높이는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나란한 레일 위를 달리는 지하철처럼.
이 글은 광주도시철도공사가 발행하는 <광주메트로>(2010봄호)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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