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개천에서 '용'되다

 서른 다섯 살의 남자1


세풀 100호를 펴내는 2004년. 노을이는 서른다섯 살이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과 비교하면 대략 반환점을 맞이한 해다. 이 특집은 ‘우리사회에서 서른다섯 살의 비혼 남자는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싶은 궁금증에서 비롯됐다. 한꺼번에 입체적으로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욕심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아홉 가지 주제를 잡았다. 서른다섯 살의 꿈, 직업, 글쓰기, 연애, 정치, 사회, 경제, 일상, 문화. 그리고 그 앞뒤를 살아온 서른다섯 해, 살아갈 서른다섯 해로 꾸밀 계획이다. 모두 11가지의 내용을 매달 두세 가지씩 풀어볼 계획이다. <노을이가>


 

개천에서 용 되다

프롤로그 - 서른다섯, 살아온 해를 들여다본다.


지난 겨울 어느 날, 직장 직원 셋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직장 초창기부터 함께

해오던 지인들로 그럭저럭 마음을 맞춰가며 살던 지인이었다. 대개의 직장인들 술자리가 그랬듯이, ‘공장’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게 마련인 그날, 우연찮게 ‘가문과 출세’가 소재로 떠올랐다. 모 직원이 전직 장관의 아들인데, 결혼식부터 남들과 다르더라는 얘기 끝이었다.

‘가문과 출세’이야기는 곧장 서로가 ‘개천에서 용났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 직원은 박사학위를 가진 ‘용’이었다. 그의 ‘개천’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의 학력과 운동권으로 내몰린 형들이 있는 가정환경. 그 정도면 ‘용’이 된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 직원은 집안이 가난해 상고를 가라고 했던 어머니와 그에 맞서 독학을 해야 했던 시절과, 대학 다닐 때 운동권으로 살면서 부모나 오빠로부터 쫓겨 다니던 시절이 ‘개천’임을 들어 ‘용’이 되었음을 주장했다.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나눈 얘기였다. 지금 시절이 어려웠다면 씁쓸함이 컸을 자리였지만,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나이들인지라 호쾌한 웃음들로 혹시라도 묻어날 씁쓸함의 여백을 채워나갔다.


그 자리에서 나 역시 개천에서 난 용임을 강조했다.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부모의 학력, 시골에서도 ‘우리집’이 없이 살다가 20여 년 전 서울에 올라왔을 때 250만원짜리 전세를 살았던 경제력,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렇다 할 연줄도 없는 인맥…. 누나들 셋 역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돈을 번다고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했던 것 등 그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한 내 주변을 둘러보자면 그것은 분명 ‘개천’이었다.


대체로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경우 부모들은 나름대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교직에 종사하거나 사업을 하고 있거나, 또한 경제적으로도 뭔가 ‘있어’보였다. 하다못해 형(오빠)이나 누나(언니)가 무엇을 하고 있었고, 이모나 삼촌이 역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부모의 학력, 경제력이 2세에게 대물림되는 게 갈수록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에서 그런 일은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개천’을 염두해 두고 ‘빽’이 없으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우리 사회를 둘러보자면 지금의 나는 분명 ‘용’이다. 비주류의 잡지사에서 몇 년 기자생활 하다가 그 흔한 6급 공무원으로 사는 정도를 ‘용’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심각한 사실왜곡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장법은 사용되었을지 모르나 왜곡은 아니다. 내 주변의 지인들이 살던 물에 비하면 ‘개천’이 워낙 빈곤했기 때문이다.


나는 서른 다섯 해 동안 그런 ‘개천’을 원망해 본 기억은 없다. 그런 처지 때문에 무엇을 못 한 기억은 있지만, 그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 근원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부모의 삶의 처지가 차마 그런 원망을 만들 수 없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가난하였으나 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 끊임없는 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차마 원망을 품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들의 삶이 그러한데 그것을 외면한 채 무엇을 바랄 수 없었다. 심지어 학용품 산다고 돈을 받아 군것질하던 그 흔한 학생 시절의 추억담마저 내건 없다. 원망이 없었기 때문에 달리 절망도 없었다.


그런 내가 그런 개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힘은 주변 사람들이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스무 살 이후였다. 그때부터 내 주변의 많은 지인들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왔다. 그 지인들은 내 상황에 대한 한두 마디 조언으로, 한두 푼의 경제력으로 내게 도움을 주었다. 때로는 내가 가진 능력을 높게 평가해 과분한 역할을 주기도 했다. 대체로 인연이 닿는 만큼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고, 또한 인연이 멀어지면 저만큼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지인들의 덕으로 지금 나는 ‘용’이 돼 있다. 사실 사람과 사람으로 얽힌 사회의 ‘개천’에서 태어난 사람이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성장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낙타’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성공하기란 바늘구멍 통과하기와 같은 난관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서른다섯 해를 들여다보면, 이제는 ‘개천’의 힘보다 중요한 것은 지인과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관계는 결코 얻으려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 관계는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향과 태도를 제대로 견지하고 가는 자세가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지인을 얻기 위해 삶을 가꿔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걷다보면 지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계속 / 2004 01)


<사진설명>
내사 살던 동네에는 진짜 개천이 있었다. 당시 개천은 물이 많이 흘러 요름철이면 아이들의 물놀이터로 적당했다. 2005년 고향마을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