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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공존하면 깨지는 평화, 그 모순


2005년 새해, 첫 달에 만난 지인들1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다. 우연이었다.

이틀 전, 어머니와 통화하다가 1월 1일에 아버지에게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별 말 없이 그러자고 했다. 아버지 생전엔 절대 화해하지 않을 듯싶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아 화해의 마음을 비췄다.

49제 때는 가지 않겠다고 했던 분이 지난 9월에 치른 제사 때는 함께 나섰다. 아버지 생전엔 마음이 불편하셨을 거다. 그러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다보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불안한 요소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 생긴 마음의 여유는 그 불안했던 존재에 대한 보살핌의 여유까지 만들게 됐다.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을 찾아가기로 한 것은 신년 핑계로 그냥 ‘놀러가는’ 기분으로 갔다 오려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가족들이 모인 것이다.

하루 전, 인천에 사시는 큰 매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차에 1일에 아버지에게 간다는 얘길 했다. 매형은 그 얘길 듣고는 그럼 함께 가자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잖아도 매형은 1일에 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큰누나에게 얘길 했단다. 그런데 큰 누나는 설에 가니까 다음으로 미루자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간다고 하니 그럼 함께 가자고 한 것이다.


하루 전 오후엔 둘째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랑 간다는 얘길 듣고는 어떻게 갈 거냐고 묻는 전화였다. 둘째 누나네도 아버지 산소에 가자고 둘째 매형과 얘기를 나눴단다. 평소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달리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 신년엔 매형도 집에 있어서 그러자고 했단다. 또한 설날에는 시집이 있는 남원을 가느라고 산소엘 못 가볼 듯해 이참에 가자고 했단다.


그래서 일행은 세 팀이 되었다. 자가용이 있는 둘째 누나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나와 큰누나네는 정발산역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납골당에서 만나 간단히 제를 지냈다. 큰 누나가 장만해온 과일과 북어포, 부침 정도를 놓고는 절을 올렸다. 마실가듯 가볍게 오려했던 일이 식구들이 참여하면서 빈약한 차례상까지 마련한 것이다.


납골당에서 간단히 차례상에 차린 음식을 나눠먹고는 면목동 둘째누나네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둘째 매형차가 8인승이라 모두 한 차에 탈 수 있었다. 일산에서 한강변 도로를 따라 면목동으로 가는 동안, 어머니와 두 누나가 합심해 결혼하라는 얘기로 차 안을 가득 채웠다. 건성으로, 못 듣는 척, 해 봐도 이 밀폐된 차 안에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저녁은 둘째 매형네 집 근처의 음식점으로 갔다. 보쌈을 주문하고 소주를 마셨다. 둘째 매형은 모처럼 속내를 살짝 비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사판에서 전기일을 하시는 매형은, 자신이 이십 여년 가까이 현장에서 익힌 기술도, 자격증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하신다. 그래서 경쟁 입찰 들어가면 밀린다고 하신다. 그 전까지는 직장에서 받는 그런 경쟁과 승진 등의 스트레스를 못 느꼈는데, 최근에 그런 일을 두어 차례 겪고 나니 약간은 알겠단다.    


큰 누나도 음식점으로 오던 길에 고생스러웠던 옛날 일을 무심히 꺼냈다. 월간 ‘인권’에서 창신동 지역의 미싱일을 다룬 적이 있는데, 그 기사를 읽은 누나는 그게 딱 내 얘기라며 둘째 누나에게 풀어놓았다. 큰 누나나 둘째 누나 모두 열서너 살 때 서울로 올라와 미싱일로 돈을 벌었다. 그 얘기 끝에 내 얘기도 묻어 나왔다.


“그때 정환이가 엄마아빠 싸운다고 편지를 쓰곤 했는데, 그때는 정환이랑 서울로 데려올까도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남원 살 때, 나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부부싸움 하면 나는 무섭고 서럽고 화가 나는 기분을 어찌 하지 못해 서울에 있는 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마음을 풀었다.


어머니도 한 마디 하신다.

“그때 어찌 내가 서울로 올 생각을 했을까 싶어이? 남원에서 대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만 올라왔어도 지금쯤 집 한 채는 샀을 텐데….” 
    

식구들끼리 함께 밥 먹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관망했다. 술은 마셨지만 애초부터 취할 생각이 없었다. 누나들이 서울로 간 이후 한번도 제대로 함께 모이질 못했던 가족들이다. 아니, 명절 때는 함께 모였지만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부모님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그 싸움 한 판에 모두들 서둘러 뿔뿔이 돌아가 버렸다. 가족들끼리 외식을 한다는 것도 티비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외식을 하고 있다. 아버지 산소에 다녀온 날 저녁에. 그냥 이 자리에 아버지가 앉아 있어도 좋으련만, 그것 하나가 더해지는 순간 이 자리는 성립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또한 있다.


음식값은 어머니가 내라고 했다. 평소엔 돈 백원에도 벌벌 떠시지만, 다행히 요즘엔 가끔 뭔가를 사주고 싶어하는 것을 아는지라 그렇게 하시라고 권해 드렸다. 마침 어머니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돈을 내가 얼마 전에 조금 드렸기 때문에, 어머니 역시 큰 손실은 아닐 거라 싶었다.  

두어 시간 식사 겸 소주를 마시고 밤 9시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둘째 매형 집에서 주무시기로 했다.


공존하지 못하는 평화. 그것이 조금 쓸쓸했다. 공존을 그리워해 만나면 평화가 깨지고, 그처럼

깨질 평화를 알기에 누구도 감히 공존을 꿈꾸지 못했던 관계. 어쩌면 아버지만은 공존을 꿈꾸었지만, 평화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었던 꿈. 그래서 결국 공존도 평화도 얻지 못했던 인연들. 그것이 아버지 생전에 우리 가족이 가진 모순이었다. 세상은 그 모순을 알 잘면서도 그저 지켜보았다. 냉혹했다. 나처럼.(2005 01)  



<사진설명>

어릴적 살았던 시골 집에서 본 풍경이다. 예전엔 대나무밭이었으나 2005년 찾았을 때는 대나무는 거의 사라졌고, 앞에 있던 논들도 경지정리가 말끔히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