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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자전거의 짝사랑

금강 길은 자연의 본능만 꿈꾼다

옥천군 향수100리길을 달리다  
지도는 길을 표현하지 못한다. 거리와 방향만 나타낼 뿐이다. 길 표면이 어떠한지, 길 경사는 어떠한지 등 길의 내밀함을 말해주진 않는다. 여행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 지도의 한계로부터 시작된다. 지도가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을 기어이 확인하겠다는 욕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적어도 옥천 자전거길인 향수100리를 높새와 달린 이유는 그랬다. 심지어 시청율 높은 1박2일 프로그램에서 방송되었음에도 내 몸은 그 길을 확인하고 싶었다. 

11월 22일 높새와의 동행은 대전버스터미널에서 시작했다. 옥천역까지 4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 거리는 '지도'상이었다. 대전시내를 벗어나 가양비래공원이 있는 산자락으로 접어들 무렵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50여미터 남짓 끌고 가던 자전거에 올라탔을 때, 이번엔 500미터가 조금 안되는 터널이 나타났다. 터널을 통과했을 땐 도로는 편도 2차선이었지만 그만큼 질주하는 차량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 모든 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본격적인 페달 동행은 옥천역부터라고 계획했는데, 그 출발선까지 가기 전부터 시합이 시작된 꼴이었다. 4번 지방도를 따라 옥천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쏜살같은 차량들이 거슬렀다. 편도 2차선이지만 갓길이 없어 높새의 영역을 확보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백미러에 의지해 바깥 차선의 가장자리선을  길삼아 달렸다. 

신고식을 호되게 한 후
본격적인 향수100리길 여행은 옥천역에서 시작됐다. 
첫번째 목표 지점은 장계휴양지다. 지도로 보자면 향수100리길의 3분의 1지점쯤 된다. 옥천역을 벗어난 길은 편도 1차선 도로로 이어졌다. 옥천성모병원을 지나 문정사거리까지는, 고개는 없었지만 자전거 길을 확보하기엔 쉽지 않았다. 갓길은 자주 종적을 감췄고, 지나는 차들도 적지 않았다. 문정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 도로에서는 차들은 조금 줄었지만, 이번엔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달아 이어졌다. 기어달린 자전거라면 조금만 힘을 보태도 넘을 수 있는 경사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30여분쯤 달리고 나니 향수100리 길을 찾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옥천군청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지도는 해상도도 낮은 데다, 정밀성도 떨어졌다. 종종 멈춰서 지도 보기를 서너 차례 했다. 교동리를 지나 복골칼국수집 앞길에 난 삼거리에서는 횡단없이 오른쪽 길을 택했다. 국원리 인근에서 37번 도로 밑을 통과한 후  만난 삼거리에서도 지도를 펼쳐야 했다. 지도로 보면 어디선가는 37번 도로를 타야 장계유원지에 들어서지만, 그 지점이 어딘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럴 땐 본능처럼 직진했다. 잘못 든 길이라도 돌아올 시간은 충분했다. 다시 한번 산자락을 오른쪽에 끼고 고갯길을 오르던 때, 눈앞에 대청호가 펼쳐졌다. 더욱이 앞길은 U자형으로 굽은 내리막길. 어느새 오가는 차들도 확연히 줄었다. 그래 이 맛에 자전거 타지 싶어 질주하다보니,  앞서 달렸던 자객(자전거 여행객) 두 명이 대청호와 사진찍기에 바빴다. 이 길이 잘못됐다면 헤맬 사람이 더 있다는 불온한 안도감을 잠시 느끼며 다시 길을 열었다.  

이어진 2킬로미터 남짓한 길은 대청호와의 동행이었다. 오른쪽에 펼쳐진 대청호를 시야에 두고 달리는 길은 향수100리길의 첫 번째 맛이었다. 한적한 도로와 대청호가 펼쳐진 전경, 딱 거기엔 그 속도가 어울리는 자전거까지가 삼위일체가 되었다. 간간이 드러난 오르막과 내리막만이 자전거의 속도를 조율하는 그곳에서 사람은  그저 무심했다.
 
그 맛은 37번 도로를 만나면서 잠시 접어야 했다. 37번 도로 역시 오가는 차들이 많았다. 고개도 있고, 갓길도 틈틈이 자취를 감췄다. 도로 주행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더럭 겁부터 날 만했다. 웬만한 기어를 갖춘 자전거라도 한번에 오르긴 버거운 고개를 넘어 내리막의 묘미를 찰나처럼 즐기고 나니 드디어 장계휴양지 앞에 섰다.

 
장계교를 지나며 맞이한 아침햇살은 물위에 비친 햇살이 일품이었다. 굽은 호수를 따라 유연하게  휜 햇살은 바라보는 이의 눈을 자극하지 않는 미덕까지 지녔다. 그 순간 수 많은 곳에서 수 많은 이들이 아침 햇살을 보았을 테지만, 그들에게  충분히 권할 만한 햇살이었다.  장계교에서 2킬로미터 못 미쳐서 길은 575번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었다. 그 직전에 길바닥에 파란 페인트로 쓰인 '향수 100리'과 화살표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이정표였다. 

575번 길은 휴식의 도로였다.  편도 1차선인 길은 오가는 차들도 거의 없다. 사람의 종적도 살피
기 어렵다. 그러나 길은 모든 게 자전거 편은 아니었다. 그 조용한 길이 시나브로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그 오르막 앞에서 자객들은 하나 둘 자전거에서 내렸다. 


향수100리길의 두번째 맛은 안남면 화학리 고개를 넘어 시작됐다.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이 다시 허리를 굽혀 내리막을 만들었다. 차량도 없으니 질주본능이 발동했다. 안남면사무소에서 잠시 비껴선 575번을 만나기 직전, 길에서 놀던 한 사내 아이의 길안내 도움을 받았다. 두어 마디 나눈 대화에서 아이의 아픔을 공유했다. 얼핏 보면 쵸콜릿 자국이 묻은 것같은 입술이 실은 어릴 때부터 아픈 내력이란다. 그래서인지 몸이 전체적으로 허약해 보였다.

차량이 적어 한
결 조용해진 도로는 이제 자전거 세상이 되었다. 어디쯤에서 나타날 금강을 기다리며 길을 따르면 됐다. 오르막을 살짝 넘어 예닐곱 채씩 모여있는 작은 마을을 서너 개 지나고 나니 도로에서 갑자기 아스팔트가 사라졌다. 흙길, 아니 자세히 보면 흙이 쌓인 거친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앞쪽에서 나타난 트럭 한 대가 지나고 나니 길은 순식간에 먼지에 가려졌다. 그 길에서 지나는 차들이 내는 먼지를 피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먼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먼지들에 잠시 고개를 가로 젓다보니 어느새 길 오른쪽에 금강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움을 뿌린 은빛 갈대들과 흐름을 멈춘 듯 도도한 강물은 11월이 준비한 자연이었다. 그때부터 이어진 길은 향수100리길이 간직한 세번째 맛이자 최고의 별미였다. 어느새 길은 시멘트까지 걷어내고 흙길로 바뀌었다. 왼쪽엔 경사진 산자락에 오른쪽엔 금강을 둔 길. 여전히 575번 도로지만 비포장이라 갓길도 중앙선도 없는 길이다. 자연에 가까이 서니 경계가 사라진 길이 됐다. 

자갈이 깔린 그 흙길에서 잠깐이지만 사람의 마음도 느꼈다. 앞쪽에서 오던 트럭 한 대가 시나브로 속도를 늦추었다. 처음엔 자전거의 안전을 염려하나 싶었지만, 곧 먼지를 나지 않게 하려는 운전사의  마음이 보였다. 이 길을 잘 아는 이였고, 그 전에 사람을 아는 이었다. 그 마음에 반해 자전거와 스칠 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금강 흙길은 자전거 길로서는 으뜸이었다. 간간히 깔린 자갈들이 엉덩이를 아프게 하지만, 그 정도 자극은 흙길을 둘러싼 풍광과 비교하면 엄살에도 미치지 못했다. 강물도 산자락도 모두 침묵하는 때 가끔씩 자전거 바퀴에 튕겨진 잔돌들만이 소란을 피웠다. 그늘로 들어서면 여지없이 11월의 냉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4킬로미터 남짓 이어진 흙길의 끝은 시멘트 포장길이었다. 그 길 또한 간간이 펼쳐지는 공사장을 제외하면 호젓했다.   


575번과의 이별은 금강의 본류를 따르려는 자객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575번이 본류를 두고 지류를 따라 이어졌다. 자객은 돌아올 수없는 다리를 건너 575번과 작별했다.  다시 번호 없는 도로로 접어들었지만, 길 상태는 575번 못지 않았다. 아마도 늦게 태어나 번호를 보여받지 못한 듯 했다.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두 번을 교차할 즈음, 금강휴게소를 오른쪽에 두고 달리는 길은 다시 위험도가 높아졌다. 차들은 왼쪽에 난 도속도로와 경주하듯 달렸고 갓길은 위태롭게 종말했다.

금강을 건너 동이면에 다다를 때까지 자전거길을 확보하기엔 쉽지 않았다. 금강휴게소를 지나 1.3킬로미터쯤 와서 다시 금강을 건너는 다리로 직진했는데, 지나고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직진한 길은 동이면으로 빠지기 위해 이번엔 도로를 횡단하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비록 신호등이 있었지만, 횡단이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차라리 금강휴게소를 지나 1.3킬로미터쯤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우회전해 금강 줄기를 따랐다면 좀더 안전하고 호젓한 길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정표에 대한 그리움은 동이면을 찾는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적하서거리에서 우회전해 501번 도로를 따라 동이면 소재지쪽으로 길을 잡아야 하지만, 초행자들로서는 사거리에서 직진하기가 쉬웠다. 이번엔 본능이 우회전을 택해 다행히 제 길로 들어섰다. 이어진 길은  다시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졌다. 편도 1차선인 길은 차량이 늘어나면서 자전거에겐 위험성이 증가했다. 

도중에 노닥거린 시간이 많은 탓인지, 아직 옥천군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겨울해는 자취를 감췄다. 주위엔 조금씩 어둠이 내렸다. 어느새 생활자전거를 끌고 온 자객들 예닐곱 명이 길가에 늘어섰다. 조금만 힘을 들이면 충분히 타고 올라갈 오르막이지만 모두들 자전거를 끌고 갔다. 생활자전거의 비만과 되돌아갈 즈음에 맞이한  체력의 한계가 빚어낸 결과였다. 501번 도로를 따라 옥천읍내에 거의 왔을 무렵, 길 안내를 잘못 받아 잠시 헤매이다 옥천역앞에 도착하니 벌써 주위는 어두워졌다. 어둠과 함께 옥천 향수100리길의 여정도 마무리했다. 

물가에 난 도로는 통상 높이를 멀리한다. 가능하면 수면과 평등해지려는 게 본능처럼 작동한다. 그 본능은 자전거에겐 축복이다. 한강가를 달리는 자전거들이,  한강의 지류들인 중량천, 양재천을 달리는 자전거들이, 옛 경춘가도를 달리는 자전거들이, 섬진강변을 달리는 자전거들이 그런 축복속에 질주한다. 옥천 향수100리 길 또한 그런 축복이 간간히 배여 있다. 

그 길은 가끔 자객들이 지닌 욕심의 허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 호젓한 흙길에 아스팔트만 깔렸다면  엉덩이가 아프지 않아 금상첨화일텐데...' 이 마음이 욕심이란 걸 누구든 안다. 호젓함을 말살하는 욕심임을 잘 안다. 욕심 또한 인간에겐 본능이다.   

그러나 도로의 본능이든 인간의  본능이든 그 모든 본능은 자연의 본능 앞에서 멈춰야 한다. 사람도, 사람이 만든 도로도, 그 도로에 평지의 본능을 새겨준 강물도 모두 자연일
뿐이다. 자연의 본능은 그저 자연스러움 그 자체뿐이다.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 취해 강물이 흐르는 방향까지 착각하고 달렸던 금강변의 길. 그 길은 아직은 자연의 본능에 충실했다. 
 

모든 강가에 자전거 도로가 난다면, 그건 인간의 본능으로 탄생한 도로의 본능이 발현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의 본능은 아니다. 전국의 모든 강에 자전거 도로가 난대도 그리 반갑지 않은 이유다. (201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