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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내 사람네

제주에 솟은 인권 오름


 













강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6~7명씩 모둠을 이룬 수강생들이 대자보에 토론 주제를 적었다. 작업치료, 격리 및 강박, 전화사용 금지 및 제한 등 정신보건시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 이슈들이었다. 이때부터 강의장은 토론하는 수강생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30여 분 후 모둠별로 나와 각 이슈에 대해 환자의 입장, 환자 보호자의 입장, 직원의 입장 등을 대변했다.


11월 12일 오후, 제주시 월평동의 제주정신요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신보건 종사자 인권교육장. 이날 강사로 나선 홍기룡 제주평화인권센터 소장은 토론의 흐름을 잘 이어나갔다. 그는 일방적 주입이 아닌 참여와 소통 방식을 유지하면서, 때론 예측할 수 없는 수강생들의 질문에 답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한 코디네이터였다.


제주도는 그 지형상 인권 분야보다는 환경 분야가 더욱 활성화된 곳이다. 4.3사건 당시 발생한 양민학살을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애인이나 여성 등 당사자 운동이 인권 운동의 맥을 이어왔다. 그런 제주도에서 2~3년 전부터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지난 3월엔 제주지역 5개 단체가 인권단체연석회의를 구성했다. 더불어 인권교육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인권의 오름이 새롭게 솟고 있다. 홍기룡 소장은 지역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그런 흐름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거의 없었는데, 한두 해 전부터 인권교육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인권단체 활동가, 중.고등학교 교사 등을 포함해 경찰 수사관 등도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 강사단이기도 한 홍 소장은 이런 변화가 인권위와 제주지역 인권 활동가들의 노력이 결합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 특히 제주지역 인권 활동가들의 노력은 ‘리얼’하다.


제주지역에서 인권교육을 체계적으로 준비한 때는 2008년. 당시 인권위가 준비한 인권활동가 워크숍에 참여한 이들 10여 명은 ‘인권교육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을 통해 인권교육을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현재 장애, 이주, 청소년, 평화, 인권 일반 등과 관련해 모두 8명이 남았는데, 이들은 월 1회 모임을 열고 있다.


“모임에서는 각자 교육했던 내용을 평가하거나, 교육할 예정인 내용을 시연해 미리 평가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육 프로그램이나 기법, 자료 등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른바 ‘집단지성’의 지혜로 교육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선수’들끼리 시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기도 하고 긴장감도 더 생긴다.” 그럼에도 이들은 매월 그 긴장을 즐긴다.


홍기룡 소장이 인권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까지 그는 기독청년운동을 했었다.

“당시 성산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울고 있던 20대의 중국 한족 청년을 만났습니다. 얼굴에 멍도 들고 하여 사연을 들어보니 갈치잡이 배를 타던 이주노동자였는데, 선주에게 폭행당해 경찰에 신고했는데도 오히려 경찰에서는 선주를 데려다 이런 일로 경찰서까지 오게 하냐는 바람에 하소연할 곳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홍 소장은 이 일을 계기로 선원 이주노동자 쪽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전까지는 ‘있었어도 몰랐던’ 선원 이주노동자들의 실체를 확인했다. 이후 다문화 인권 영역에 대한 관심을 높여갔다. 제주평화인권센터에서는 이주여성 남편교실 프로그램 개발 연구, 이주와 노동 관련 세계시민교육, 제주지역 관광·서비스산업 이주노동자 실태 조사 등을 추진했다.


“1998년만 해도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고립돼 있어서 서로 만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시내에서

도 자주 눈에 띕니다. 추자도만 해도 인구의 10%가 이주노동자입니다. 그럼에도 열악한 근무환경에 고용 불안정과 임금체불 등 노동권 문제가 점점 불거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없습니다.”


이에 홍 소장은 지난 11월 광주에서 열린 호남.제주지역 이주단체 정책간담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인권위가 실태조사에 나서 줄 것을 제안했다.


홍 소장은 2004년 제주지역에서 열린 인권활동가 워크숍에 참석하며 인권위와 처음 만났다. 이후 2008년부터 올해까지 3년째 이어진 제주지역 활동가 워크숍을 함께 준비하기도 했다. 가끔은 인권위가 제주도에서 사업을 벌일 때 자원봉사자로도 기꺼이 나선다. 그런 홍 소장은 이제 인권의 영역 중 관심사에 대해 약간의 각도를 조정하려 한다.


“앞으로는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문화권 등 사회권 영역에서 당사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이를 네트워크 삼아 운동의 성과를 교류하는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이해관계가 엇갈려 부자지간이 끊어질 정도로 마을 공동체가 훼손돼버린 강정마을 주민들의 건강권과 행복추구권 등도 여전한 관심사입니다.”


인권의 경계는 늘 허물어지게 마련이며, 그 시선은 먼저 현실의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유 있는, 또한 기대되는 대목이다.(20101130)


* 이 글은 격월간 <인권>에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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