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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강요된 ‘은닉’ 한 남자의 추모행사장에는 고인의 영정이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뒤엔 당당히 동성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던 유언… 그러나 자살을 선택하게 한 현실은 그의 죽음보다도 더욱 견고했습니다. 이 강요된 ‘은닉’속에서 단상에 놓인 피지 않은 백합이 스무 해 짧은 생의 날들을 아쉬워했습니다. 다만, 현수막만이 희망을 덧붙였습니다. “동성애자 억압 없는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2003년 4월 한 동성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커밍아웃 후 힘들어 고등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남은 동성애자들이 "한 번쯤 자기 손목에 칼 안 대어본 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사회적 차별로부터, 그는 홀연히 이별하였습니다. 그 이별 앞에서 차별과 편견이 .. 더보기
나는 아니더라도 그의 연기에 즐거워했던 사람들 가운데 정작 ‘커망아웃’ 이후 그의 고통은 얼마나 나누었을지… 2000년 가을 ‘커밍아웃’한 홍석천님은 그 후 1년 여간 방송에 출연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수 이상은의 격렬한 춤에 반해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석천님은 영원한 은사 최형인 교수를 만나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적어도 한 사람은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머니가 딸만 셋 낳아 아버지가 이복형을 둔 일, 중학교 때 남학생들로부터 성폭행 당한 일, 연기자로서 가진 얼굴 콤플렉스, 여성보다 남성을 더 좋아한다는 성적 정체성… 그 모든 고백은 최 교수와 나눈 석천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커밍아웃’ 이후 동성애 단체가 주관한 행사에 참석했던 그에게 언론에서 물었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