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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깊은사람

인권 평화 생태를 만나는 작은 감수성

 

부제  : <하늘깊은 사람>, 미리 쓴 에필로그 


늦봄, 춘천에서 소설가 공선옥님을 만났다. 한참 수다를 떨던 차에 공선옥님은 ‘악은 결코 선을 이기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말을 조금은 시니컬하게 받았다. 
“삶에서 그런 걸 증명해 본 적이 있어요?”
“선이 꼭 악한테 이겼어요? 현실에서는 악이 이긴 적이 많지 않나요?”

이어지는 물음에 공선옥님이 내놓은 답은 이랬다.

“악이 많이 이기지.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런 질문을 하는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니? ‘내 평생 동안 선이 악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악이 선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믿음이 여기에 저를 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이러는 내 삶이 잘못되었냐?”


1.

인권, 평화, 생태.

서른을 전후해 내 마음에 ‘시나브로’ 자리 잡았던 단어들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바라던 20대의 생각이, 좀더 큰 방향을 잡아가려는 과정에 만난 말들이다. 당시 만났던 많은 지인들의 말과 글, 활동을 보면서 깨쳤던 의미들이기도 하다. 인권과 평화, 생태는 각기 다른 내용과 지향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큰 한 길을 걷고 있는 동무들이다.


인권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진 권리를 일컫는다. 장애인들이 거리를 편하게 이동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며, 흉악범이더라도 법이 정한 형벌 이외의 고통은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권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국민들의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인권의 기본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인권은 또한 차이를 인정하며, 차별을 배제하고, 평등을 지향한다. 각기 다른 삶의 지향을 가졌더라도, 그를 존중하고 내가 소중한 만큼 그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인권을 키워간다. 그래서 “세상 어느 구석에서 고통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가 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한 어느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인권의 깊이를 되새기게 하는 고언이다.


평화는 흔히 전쟁과 대립적인 의미로 표현된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다. 그러나 평화의 지향은 좀더 깊고 폭넓다. 평화와 대립적인 전쟁은 기본적으로 무차별적 폭력과 대량학살로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맞는 개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통과 죽음을 상상하며 공포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한 개인에게 고통과 공포를 주는 행위들은 수없이 많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아이의 일상은 반평화적일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제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평화적인 삶을 꾸려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는 육체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 정신적 자유를 지향한다. 버마 민주화운동을 지도한 아웅산 수지는  “평화는 내면적인 고요함”이라며 “폭력도, 두려움도 없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온함, 그것이 평화”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평화는 이제 우리 일상의 갈등을 해소하고 이해를 넓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생태는 기본적으로 ‘환경문제’라는 말로 보다 익숙해진 개념을 표현한다. 인간이 ‘발전’이란 미명아래 지구의 문명을 차츰 변화하면서 그로인해 발생한 각종 공해와, 쓰레기가 그 환경문제에 해당한다. 그런 문제가 결국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으로부터 환경의 중요성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 위기의식은 다른 무엇이 아닌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을 염두해 두었기에, 사람만을 강조하였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우월성을 갖게 됐다.

 

생태는 그보다 좀더 큰 철학을 요구한다. 생태적 시각에서 보자면 “사람은 꽃만큼 아름답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즉,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 그것이 꽃 한 송이든, 새 한 마리이든, 한 사람이든 각기 고유한 존재며 생명의 무게는 견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태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먹이사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길을 끝없이 찾는 생명 있는 것들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실천이자 마음이다. 


인권과 평화와 생태는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의미들이다. 모든 생명이 더불어 소중하다는 생태적 의식이 있다면, 나만큼 소중한 남을 함부로 대하는 반 인권적인 행위도 줄어들 것이다. 타인이 소중하다는 인권의식이 있다면, 문제를 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아울러 온갖 폭력을 최소화하려는 평화의식은 생태적 공동체로 나가는 데 좋은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2.

서른을 전후한 동안 살면서 깨달은 또 한 가지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설득 방식이다. 의견이 대립할 때 옳고 그름을 논해 상대보다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평가받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생 관계’가 아닌 ‘대립 관계’에서 유용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논쟁이 끝나고 나면 이미 감정의 골이 깊게 패여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대립된 사람을 배제한 채 이긴 자들만으로 이뤄지는 세상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체로 많은 일들이 갈등이 해소된 후에도 갈등을 겪은 상대방과 함께 더불어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패인 감정의 골 때문에 이기고 나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를 종종 보곤 한다.

흔히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는 얘기는 가급적 삼가라고 한다. 이는 곧 싸우더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싸움은 과정일 뿐이며, 과정이기 때문에 싸움이 끝난 후를 생각해 본다면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 현실적 한계에서 찾은 표현의 방식이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 논쟁 못지않게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감성은 또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 <하늘깊은 사람>은 인권, 생태, 평화의 이야기를 논리적 주장보다는 감성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음과 마음이 얘기를 나누고, 머리보다 먼저 가슴이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감성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취한 것이 시 형태를 띤 글이다. <하늘깊은 사람>은 시는 아니되, 시가 가진 운율을 흉내 냈다. 추임새가 담긴 글이 좀더 사푼히 마음속에 내려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깊은 사람>은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쓴 글이 아니다. 대부분의 글은 책이나, 영화, 방송, 언론 등에서 소개된 소재를 바탕으로 했다. 또한 내 일상에서 겪고 깨달은 느낌들을 소재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소재로 삼은 글은 취재를 한 기자들의 지혜를 빌린 셈이고, 책의 내용을 소재로 삼은 것은 필자의 지혜를 빌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송과 영화 또한 그런 작품을 만들기까지 수고한 많은 이들의 지혜를 빌렸다.


그러나 소재를 빌렸을지언정, 그 의미와 주제까지를 가져오진 않았다. 다른 이들이 공들여 만든 작품을 몇 마디 글로 압축해서 나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놓고도 그 사람의 가치관과 시각에 따라 무척 다르게 해석된다. 영화평론가가 이미 제작된 영화를 보고 한 편의 평론을 쓰듯이, <하늘깊은 사람>은 내가 만난 텍스트들을 인권과 평화 생태의 시각과 의미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이러는 내 삶이 잘못되었냐?”

소설가 공선옥님은 선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했다. 

인권, 평화, 생태.

누구든지 길을 막고 묻더라도 이 세 단어의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인권과 평화, 생태의 호흡을 함께 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는 동의하지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이해관계를 따지면서 이들 단어의 의미는 유보되고 퇴화하고 변질된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삶을 걸고 각각의 의미를 실현하는 ‘개인’들의 존재는 언제든 우리 사회의 희망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개인이 되고자 다짐하지만, 나는 오늘도 더딘 발걸음만 내딛는다.


다만, <하늘깊은 사람>이 인권, 평화, 생태감수성에 사색과 느낌을 줄 수 있는 작은 인연이 되었다면,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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