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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온날

40년만에 처음 만든 게장조림

 


출장길에 틈이 생겨 강진읍 5일장을 구경했다. 터미널에서 택시 승강장 쪽으로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고 나니 5일장을 찾긴 어렵지 않겠다 싶었다. 골목입구에 언뜻 보아도 물건을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골목입구에서 만난 할머니는 대여섯 개의 함지박을 땅에 두고는 물건을 내 놓았다. 그 물건 중에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게였다. 뻘을 씻지 않은 상태인 게들은 살아서 활발히 움직였다. 함지박이 조금만 낮았다면 수십 마리는 길거리로 줄행랑을 칠 정도로 생생했다.


존재를 인식하는 데 지식보다 경험이 앞선다. 나도 예외일 수 없어, 게를 볼 때 먼저 경험이 떠올랐다. 경험에서 만나는 게는 반찬거리, 즉 음식이었다.

어릴 적 남원에 살 때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은 그리 많지 않았다. 텃밭에서 나는 채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밥상에 별미가 오를 때는 남원장이 서는 날이었다. 장에 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 뭔가를 사 오시면 그것이 곧 별미였다. 그 중에 한 가지가 어린 게였다. 장조림으로 내놓은 게는 한 마리를 집어 두 번 베어 먹으면 반찬으로 그만이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껍질과, 몸통을 씹었을때 느껴지는 꽉 찬 속 느낌도 좋았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 온 후 게장조림은 잊혀졌다. 어머니 역시 집에서 반찬을 만들더라도 게장조림은 좀처럼 밥상에 오르지 않았다. 밖에서 사 먹자고 해도 쉽지 않았다. 게장조림은 간장게장처럼 별도로 메뉴로 마련될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요 음식에 반찬거리의 하나로 올려지는 게장조림은 사 먹기도 수월하지 않았다.그처럼 입에서 멀어진 음식의 존재는 의식에서도 사라졌다.


그러던 게장조림을 다시 만난 때는 두어 주 전쯤의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사무실에서 자주 가는 한 음식점에서 반찬 중의 하나로 게장조림을 내놓았다. 반가운 마음에 주 음식인 된장찌개보다도 게장조림에 젓가락이 자주 갔다. 옛날의 맛과 비교하긴 어려웠지만, 오독오독 씹히는 게껍집은 그 어릴 적의 추억까지 되살려냈다.


그 맛에 공기밥을 반도 비우기도 전에 게장조림 반찬을 한번 더 주문했다. 급기야는 가게 주인에게 게장조림을 5천원어치만 팔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루 반찬을 그날 그날 만들어 파는 곳이다보니 팔만큼의 반찬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아쉬움만 간직한 채 그날 저녁 한 끼의 반찬으로 만난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랬던 게를 오늘 강진에서 다시 만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게를 사고 싶었다. 그러나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시작한 강진 오일장 구경에서는 게를 파는 가게를 주로 찾았다. 생선을 팔던 곳도 꽃게를 팔던 가게에에서도 혹시 장조림용 게를 팔지 않아 기웃거렸다. 가게나 난전에서 게르 파는 곳에 가면 기웃거리면서 가격을 곁눈질했다.


오일장을 한바퀴 돌고 나올 무렵, 길가에서 장조림용 게를 파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게들은 생생했고, 한 바구니에 5천원씩 팔았다. 장보러 온 할머니 두어 명이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게들이 다 남자뿐이네. 다 남자여.”


옆에 있던 할머니가 살아 움직이는 게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숫게보다는 암게가 반찬거리로 적당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팔고 있는 게의 성별을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 가게 앞에서 가격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는 정도만 확인하고는 장터를 나왔다. 게를 사더라도 볼 일을 본 후 광주로 가기 전에 사야 했다.


강진군에서 볼 일을 본 후 광주로 가기 전 다시 오일장 입구 골목으로 들어갔다. 처음 봤던 할머니를 찾아갔다. 다행히 게들이 아직 남았다. 여전히 그릇을 벗어나기 위해 바삐 움직거렸다.


“게, 얼마에요?”

“뭐가?”

“이 게, 한 그릇에 얼마냐고요.”

“삼천원.”

“그럼 삼천원 어치만 주세요. 많이 주세요.”

 

할머니는 검은 봉지를 왼손에 들고는 오른손으로는 냉면그릇처럼 큰 그릇으로 게를 퍼 담았다. 한 그릇을 퍼 담고는 다시 그릇의 1/3쯤을 더 담았다.

“할머니, 5천원어치로 주세요.”

할머니는 다시 한 그릇을 퍼 담았다.

“이게 광주까지 가야 하니까 잘 싸 주세요.”

“걱정 말어. 서울까지 가도 암시랑토 않응께.”

두 겹으로 포장한 게를 건네받았다.

 

광주로 오는 버스 안에서는 혹시 게가 죽을까봐 비닐봉투를 살짝 열어두었다. 옆 자리가 빈 좌석이라 다행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물통에 물을 받아서 넣어두었다. 

 

내 음식만들기의 교과서는 어머니가 음식 만들던 그 옛날 기억있으나, 게장간장을 만드는 법은 그 기억속에 없었다. 그러니 게장조림 요리법은 둘째 누나의 도움을 받았다. 통상 어느 집안이나 음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한 둘 있게 마련인데 우리집은 둘째 누나가 그 몫을 해냈다.


“굵은 소금을 넣은 물에 담가두었다가 씻어. 그리고는 식용유를 넣고 살짝 볶은 다음에 간장 넣고 쫄이면 돼. 물을 적당히 부어서 간을 맞추고. 근데 해 먹을 수 있겠냐?”

“걱정마. 내가 잘 하면 좀 갖다 줄게.”

 

누나엑 얘기 들은 대로 굶은 소금과 간장을 사와서 씻는 것부터 시작했다. 30여분 소금물에 담그고 이후 수돗물로 씻어내는 동안에도 게들은 활발히 움직였다. 이윽고 속 깊은 냄비를 꺼내 게를 넣었다. 그대로 식용유를 붙고는 가스렌지에 불을 켰다. 살아 움직이던 게들은 얼마 되지 않아 미동마저 사라졌다. 어느새 껍질은 약간의 노릇한 기운까지 돌았다.


그쯤에서 간장과 물을 부었다. 간장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늘을 씻었다. 마늘을 간장에 졸이는 게 있으니 여기에넣어도 무방하다 싶었다. 누나 역시 넣어도 된다고 했다. 대신 어래 끓이면 풀어져 버리니 나중에 넣으라 했다. 얼마쯤 지나 긴장이 끓었다. 5분 가량 지난 후에는 마늘을 넣었다. 이제 조금만 더 끓이면 40년만에 처음 하는 게장조림이 완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기엔 조금 아쉬웠다. 냉장고 안에 있던 매실원액을 꺼내 게장 조림에 부었다. 누나가 조언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즉흥적이었다.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냉장고를 열었고, 그곳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매실원액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매실원액을 요리에 넣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간장게장이라도 안될 이유는 없어보였다.


게장조림은 거기서 끝났다. 조림을 마친 후 반찬 그릇에 나눠 담았다. 5천원 어치는 양이 무척 많았다.

다음날 아침식사 반찬으로 게장조림을 상에 올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시식을 맡길 일도 없으니 내가 좋으면 좋은 거다.
맛! 그런대로 괜찮다. 게장조림, 잘 벌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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