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두렁을 이내 새까맣게 삼키고 난 불은 삽시간에 집쪽으로 향했다. 석이는 자기 앞으로 달려오는 불을 보자 덜컥 겁이 일었다. 들고 있던 솔가지로 달려드는 불을 내리쳤다. 그러나 잔디에 붙은 불은 오히려 솔가지에 튕겨 옆으로 떨어졌다. 다시 순식간에 몇 군데에서 불이 시작되었다. 석이의 이마엔 땀이 맺었다.
석이가 쥐불을 놓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누나 민희에게 으쓱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미싱 일을 하던 민희는 건강이 좋지 않아 며칠전쯤에 집으로 내려왔었다. 석이는 명절에만 보던 누나를 매일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내려올때 가져온 만화책도 이미 동네에선 가장 인기있는 책이 되버린 것 하며, 가끔씩 과자를 사 주는 것도 예전엔 없던 일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개넘어 마을로 마실을 갔다. 오전에 지붕을 뜯어내고 새로 올리기위해 짚단을 손 보던 아버지는 점심을 드시고는 마을로 가신 것이다. 아직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대로 한가함을 맛보기 좋은 계절이 이맘때였다. 겨울 한철 새끼꼬기, 나무하기등을 하고 나면 짬짬이 시간이 남았다. 어쩌면 봄에 시작되는 모내기부터 김매기의 여름, 가을 추수걷이등으로 쉴새없는 시기를 대비해 미리 보내는 휴가 같은 날이 요즘이었다.
석이의 집은 동네와 산등성이 자락을 사이로 두고 있었다. 집에 있던 석이는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감성마을 애들과 야구를 하였는데 공을 놓친 것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었다. 벽에 맞고 튕겨져 나온 공을 비료포대로 만든 글러브로 잡았다. 오늘은 그런대로 곧잘 받아냈다. 그러나 이내 지겨워지고 말았다.
민희는 부엌에서 고구마를 삶는다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석이는 부엌에 있는 민희를 힐끗 보고는 이내 비닐글러브를 마당 구석에 던져두었다. 옆에 있던 닭들이 놀랐는지 몇 걸음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석이는 이것이 재미있어서 발을 울리며 다시 주춤 몸짓을 하자 닭들은 놀라 석이에게서 급히 달아났다.
“누나야, 나 밭두렁이나 태울란다.”
“먼 밭두렁을 태운다냐. 불 낼라고 ”
“여그 집앞에 감자밭 밭두렁 말이여. 저짝 팽낭골 산쪽으로는 저번에 대판떡이 태웠은께 그짝으로는 불이 못갈 것이고... ”
“나는 몰르것다. 알아서 잘 흐그라이.”
“걱정 말랑께, 나가 애간디. 참 누나 불 다 때면 계란밥 해주라”
“계란 껍질이 있어야 계란밥을 헐 것 아니냐 ”
“응, 내가 하나 모다둔 것이 있은께 쪼금만 기달려 봐.”
석이는 부엌을 나가 신발을 내팽개치고 작은방 문을 열었다. 계란밥은 계란껍질을 이용하여 해 먹는 밥을 말한다. 계란을 위쪽에 약간만 구멍을 내고 먹은 후 솥에 밥을 짓듯이 계란껍질 안에 쌀을 넣는다. 그런후에 불을 다 때고 남은 잉겅불위에 조심히 올려 놓으면 밥이 된다. 물론 제대로 된 밥보다 껍질에 눌어붙은 밥이 더 많지만 솥에서 한 밥보다 맛은 더 있었다. 재속에 묻어서 구운 고구마를 재반 고구마반 먹는 것이 그렇고, 시루떡보다 김이 새는 것을 막기위해 시루와 솥사이에 붙이는 밀가루가 더 맛있는 것이 그러며, 잘 된 밥보다 노릿한 누룽지가 더 입맛을 당겼던 것이 그랬다.
“자, 여기 있은께 맛있게 해 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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