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여자들은 주로 물을 기르러 다니고 남자들은 대밭쪽으로 난 불을 잡은후 나뭇단쪽으로 달라 붙었다. 이미 초가지붕은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불이 옮겨 붙을까봐 미리 뿌려 놓은 것이었다. 나뭇단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치솟았으나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널려진 솔가지들은 새까맣게 탄 채 물에 젖어 있었다.
“석이냐, 니가 불 내뿌렀냐?”
“머흐다 그랬냐?”
“자식이 긍께 다마치기나 흐잖께 멀라고 빨리 집에 가드만... ...”
불구경을 온 동네 애들이 석이에게 다가서며 한 마디씩을 건넸다. 처음에 와서는 불길을 보는 것에 정신없어 하다가 불길이 거의 잡혀가자 석이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여전히 석이는 시무룩해져 코를 훌쩍거렸다.
“자슥아, 너 재환이 성 저번에 불끄던 것 생각 안나냐. 고렇게 꺼불제 그것하나 못 꺼서 요 꼬라지로 맹글어 뿌렀냐”
언젠가 동네 동산에서 고구마를 구워먹다가 불을 냈을때 재환이가 위쪽에서 아래로 구르며 불을 끄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나 흐간디 재환이 성이나 된께 그랬제”
다시 옆에서 말을 받았다. 여전히 코를 훌쩍이던 석이는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씨팔놈이, 팍 죽여불란께”
그러나 여전히 석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참 이상한 새끼네, 영철아, 내가 뭘 잘못 했다냐. 무담시 나한테 화풀이 흔다냐”
“긍께 요상흐다이, 지가 아무리 칼싸움을 잘해도 오늘은 잘못 흔것 같은디... ...”
칼싸움을 할때면 매일 석이에게 지던 영철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느그들 거그서 뭐흐냐, 불 다 껏은게 후딱 동네로 가그라. 글고 진수 너는 소죽이나 멕여라”
애들 옆쪽에서 물동이를 놓고 땀을 닦던 오지랖이 넓은 진수 엄마가 손을 휘저으며 애들을 쫓았다.
“소죽은 아까 다 줬당깨라이”
진수는 대답을 하고 다른 애들과 함께 다른 쪽으로 간다. 그러나 등네로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마당에는 멍석이 깔렸다. 십여명의 어른들이 멍석위로 올라섰다. 석이엄마는 부엍에서 오동떡과 함께 일을 했다. 민희도 부엍에서 엄마를 거들었다. 잠시 부엌을 내다보고 있던 석이는 동네 어른들 보기가 창피해서 큰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불은 다 잡혀 대밭으로 향하던 불은 바로 앞에서 잡혔고 나뭇단은 이리저리 헤쳐진 체 온통 물벼락을 맞았다. 다행히 초가집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아줌마들은 잠시 얘기들을 하다가 이내 들고 온 동이며 바께쓰를 들고 동네로 향했다. 석이 엄마가 쉬다 가라고 붙잡아도 각자 변명들을 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남정네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석이 엄니, 막걸리 받아 왔그만이라”
태모가 양손에 든 두 개의 주전자를 마루에 놓고 부엌쪽을 향해 말했다.
“오냐, 욕봤다.”
“석이는 어디 갔다요?”
“몰르겠다. 그놈의 자식, 칵 죽어뿔지”
순창떡은 아직 기분이 안 풀렸음인지 목소리가 여전히 높았다.
“아따, 어릴 때는 그럴 수도 있제 그것 가지고 뭘 그런다요. 아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르더만”
옆에서 안주 만드는 것을 거들던 오동떡이 석이편을 들며 순천댁을 달랬다. 석이는 방에서 가만히 누워서 소리를 들었다. 마당에서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섞였다. 가슴속에 있던 설움이 밀쳐 올랐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근디 어쩌다가 불을 냈다요?. 얌전하던 놈이”
“저짝 밭두렁 태우다 그랬다만이라”
“허 참, 그놈도 맹랑하긴.”
“그나저나 집에 불이 안 붙어서 다행이그만, 조금만 늦었어도 저 치간 다 날라갈 뻔 했는디”
“어디 거그만 그랬나. 대밭쪽은 어떻고. 거그에 붙었으면 참말 큰일 날뻔했제”
“아이고 다들 욕 봤그만이라. 안주도 밸로 없는지 어쩔까라이. 그냥 목 축이는 셈 치고 막걸리나 많이 드시쑈이. 모잘라면 또 받아다 드릴란께라이”
순천떡이 파전과 삶은 고구마를 양푼에 담아서 들고 왔다. 민희는 막걸리 잔으로 국그릇을 들고 왔다.
“순천떡, 잘 먹을라요. 근디 석이놈 너무 혼내지 마쑈. 애가 놀라 있던디. 그냥 액땜했다 생각흐면 쓰겄그만요”
“모르겠소, 4학년이나 된 놈이 재나 저질르고 다니고... . 나도 하나도 정신이 없은게. 난 정제에나 가볼라요.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허세요”
“그나 저나 순천 양반 오늘 빚 갚을라면 피사리하는데 품앗이로 때우먼 되것그만이”
“응, 그려 그려. 그것이 좋겠구만, 나도 요 대밭밑 논에 왕골지심이 많이 났던디. 그나저나 나뭇단 다 태워 버려서 내외간에 서로 더 껴안고 자야 쓰겠는디. 그러고 본께 불 난 것이 잘 된 거 아닌가 몰라. 허허허”
“어디가냐, 잠 안자고”
“오줌 눌라고라”
석이는 마루에 섰다. 집 앞 언덕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 언덕의 어깨선만이 드러나 있다. 저 너머 어딘가에서 다시 불이 번지고 있을 듯 싶었다. 이미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고 난 후 불 난 곳을 혼자서 이곳 저곳 살펴 본 것도 몇 번이다. 그러나 돌아오고 나면 꼭 다시 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신발을 신고 문 밖으로 향하다가 주춤했다. 무서움이 일었다. 다시 조금 내딛다가 멈췄다.
“머흐냐, 후딱싸고 들어오제”
“예”
걸음을 포기하고 화장실 앞 거름더미에 오줌을 누었다.
“물 좀 먹고 들어가께라”
부엌문을 밀치차 삐걱거리며 열린다. 부엌에 들어간 석이는 바가지를 찾아 동이에서 물을 펐다. 부엌문 옆에 나무를 쌓아 둔 곳에서부터 조심스레 물을 뿌렸다. 바닥에 있던 나무찌꺼기들을 조심히 나뭇단 쪽으로 옮겨두었다. 아궁이와 나뭇단 사이의 부엌바닥이 깨끗해졌다. 아궁이 앞에는 물을 더 많이 뿌렸다.
물을 뿌리다가 낮에 민희가 불을 때던 아궁이 앞쪽에 주먹만한 검은 덩어리가 얼핏 보였다. 흙벽이 떨어져 나간 틈을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에 그 모습이 드러났다. 석이는 바가지를 부뚜막에 올리고 그 물체를 부지깽이로 쑤시고 이리저리 헤집다가 이내 알아내고 석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낮에 누나에게 부탁한 계란밥이었다. (1995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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