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너미서뫼(西山)를 바라보던 흰날새(白首狂夫)의 눈은 어느새 가람(江)건너 높이 솟은 맞은 바래기 죽음나무뫼(東山)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프새(霍里子高)는 마을굿(祭儀)의 생각을 접고 가만히 흰날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흘린 주름이 얼굴에 담긴 연푸른 빛을 모조리 거두어들이는 듯 했다.
“혹시, 저 죽음나무뫼너머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얘기는 들어 보았지요.”
“그 마을에는 나락이라는 벼풀열매가 있어서, 이맘 때 쯤이면 그 열매를 먹고 지낸다지?”
“예, 그런 얘기는 들은 것 같군요. 더욱이 그들은 푸른구리(靑銅)보다 강한 쇠붙이(鐵)라는 물건을 만들어 쓴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그들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들은 이번 큰물(洪水)에도 아무일 없었겠지.”
“그건 모르죠.”
노프새는 죽음나무뫼너머마을에 대해 아는 대로 자세히 얘기했다. 흰날새는 다시 목이 잠기는 듯 그릇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그러나 이번엔 물이 목젖을 에돌며 곧바로 넘어갔다.
“하여간 방법이 없어. 이대로 가다간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필요해”
노프새는 가람건너 고닥나무(神木)를 바라보았다. 마을에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달랠 수 있다는 고닥나무. 한 해가 잘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마음을 바치는 일이 마을굿(祭儀)이라면, 고닥나무는 노여워진 하늘을 달래기 위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고닥나무는 너무 멀어 보였고, 그 앞을 막는 가람은 유난히 시퍼런 빛을 품고 있었다. 가람 빛위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고닥나무 줄기들이 물살에 어울려 어깨짓 하기에 여념이 없다.
“생각해 둔 일이 있나요”
“글세, 내가 생각한다고 풀릴 일도 아니고```. 저 고닥나무 잎은 여전히 갈매빛을 잃지 않고 있구만.”
혼잣말처럼 내뱉는 흰날새의 목소리는 언덕 밑을 흐르는 물소리에 말려들었다.
노프새는 흰날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마을에서 가장 큰 짐승을 잡아 바침인(祭物人)으로 뽑혔는데, 이렇게 더넘스런 큰물이 져서 먹는 일이 어려워지니 얼마나 난처할까. 이대로 가다간 마을웃어른(祭司長)이 큰 마음을 먹을 지도 몰랐다. 더욱이 여설은 자식들 둘을 데리고 잔돌긴남밭마을로 먹을거리를 구하러 갔을 터였다.
어찌어찌 해서 먹을거리는 구해 오겠지만, 열매 하나를 따더라도 적어도 나무를 오르는 힘이 있어야 하듯이, 그 마을에서 먹을거리를 거져 주는 일은 없었다. 물론 여설은 그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으로 잔돌긴남밭마을로 갔을 터였다.
노프새의 안해(妻) 고우록(麗玉)은 반움집에서 가락통판(箜篌) 줄을 골랐다. 세 번째 줄이 조금 느슨하게 풀려 손가락 끝에서 맥없이 빠져나갔다. 입놀림 한 번 제대로 못한 끼니아닌 끼니로 지내다 보니, 손가락 역시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흰날새가 두려워하고 있어요. 요즘엔 마을웃어른에 대해 투덜거리기만 해요. 지금처럼 살면 안된다면서 우리도 죽음나무뫼너머마을처럼 돼야 한다고요”
잔돌긴남밭마을로 떠나기 앞서 하늘받이나무(神堂樹) 그림자가 가람쪽으로 내릴 쯤에 찾아온 여설이 한 말이었다. 고우록은 세 번째 가락통판줄을 조였다.
“할 말은 아니지만```, 먹을거리가 풀리지 않으면 흰날새도 고닥나무로 가야하지 않겠어. 두 해나 내리 큰물이 지고 먹을 것이 없는데 마을 사람들이 바침인을 가만히 두겠어. 나야 참을 때까지는 참아 보겠지만.
고우록의 말에 여설은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머리속에서만 미루어 느꼈던 일을 말로 직접 듣고 나니, 여설의 마음속엔 커다란 돌멩이가 들어앉은 기분이었다.(계속)
*. 갈매빛 : 짙은 초록색. *. 더넘스런 : 정도 이상으로 큰.
*. 맞은바래기 : 앞으로 마주 바라다보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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