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위에 있던 봉숭아 화분을 사무실 테라스에 내 놓았다. 모처럼 하늘이 주는 비를 맞아 볼 기회를 주었다. 마치 아이를 놀이터로 보내는 듯이. 비 한두 방울이 잎사귀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보니 가지마다 꽃망울을 안고 있다. 몇 개는 조만간 터질 듯싶다. 저 작은 몸에 참 많은 꽃망울을 달고 있으니 힘들기도 하겠다. 어느 덧 빗방울에 흠뻑 젖은 잎사귀들에 싱싱한 기운이 돈다.
5월은 <작은이야기>로 온 지 만 1년이 되는 달이다. 이달 세풀을 정리하면서 1년 평가를 하고 싶었다. 몇 가지 포기 할 것을 포기 하고 난 후, 몸과 마음이 편해져 버린 이 생활. 고치지도 못할 비판을 하는 게 아니라 조목조목 지금의 내 삶을 들어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최근 복잡한 또 하나의 선이 내 주변에 그어지고 있어 그 평가를 미룰 수밖에 없다. 다시 나를 점검하고 둘러보아야 할 것임에는 분명한데, 그 선이 어디로 그어질 것인지를 본 다음에 판단하기로 한다. 다만 지금은 마음을 가볍게 할 뿐이다. 지금의 나는 이대로의 나로 남길 바라며.
어릴 때 살았던 시골집을 떠올린다. 계단처럼 세 채의 집이 있던 그곳 맨 위가 우리집이었다. 나머지 두 채는 헐리고 공터로 남아 앞이 탁 트인 남향의 집. 바로 뒤에는 남원산성까지 자락을 대고 있는 야산이 이어졌다. 땔감 나무를 하러 갔던 아버지가 봄이면 창꽃(진달래) 가지를, 가을이면 정금이 주렁주렁 달린 정금나뭇가지를 꺾어들고 내려왔던 그 산. 그 야산 자락들 사이에는 밭들이 옹기종기모여 있었다. 가끔 화장실 똥장군에 실려 거름으로 뿌려진 뒤 용케 생명의 기억을 떠올려 새순을 틔었던 개똥참외. 여름이면 어머니는 된장 찍어 먹을 풋고추 한줌과 잘 익은 노란 참외를 들고 내려오곤 했던 그 밭 자락들.
허나, 그곳은 어머니가 서러워한 땅이기도 하다. 더운 여름날 수건 한 장 둘러쓰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벗삼아 밭을 매던 곳이었다. 여름 폭설 내리던 밤, 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폭설을 맞으며 저수지로 달려가 물꼬를 트던 곳이기도 했다. 어느 해 심하게 다툰 부부싸움 덕에 그해 먹을 장이 담긴 장독이 박살 나 눈물을 가슴 독에 가득 채워야 했던 기억도 그곳에 있다. 아름답지만, 그 모든 슬픔과 여린 기억이 장단지에 곰팡이 피듯 내안에서 푹 썩어 새롭게 피지 않으면 결코 가지 않을 동네다. 과거의 기억만으로 미래를 다듬을 수 없기에 미래를 그리지 못하면 엄두도 못 낼 그곳. 그곳을 두고 가끔 생각하곤 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갈까. 내 삶의 욕심을 반만 꺾으면 어머니나 아버지의 삶이 지금보다 반쯤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만들고 싶은 잡지의 ‘-1단계’. 나를 채우는 일을 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한다.
나는 왜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가! 그 잡지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끊임없이 묻는다.
어떨 때는 운영 방식을 고민하기도 한다. 꼭 종이책 이어야만 할까? 웹진은 어떨까? 혹은 이메일진은? 월간지를 만들 것인가? 주간지는 어떤가? 내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직장을 그만 둘 필요가 없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잡지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 그럴 때마다 지금의 잡지들에게 묻곤 한다. 너희들은 왜 존재하는데, 자본을 위해?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가끔은 실릴 원고 내용을 고민하기도 한다. 신문에, 책에 실린 글을 읽다가 그 본보기가 될 만한 글들을 발견하면 필자의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해 둔다. <오마이뉴스>를 들락거릴 때도 그런 글을 쓴 필자를 잊지 않으려 한다. 특종에 목숨 걸 필요는 전혀 없다.
함께 할 사람들의 성향을 생각해본다. 얼마나 자신을 성찰할 힘이 있을까. 사람은, 자원봉사자는 몇 명이나 필요할까? 얼마나 자유로움을 줄 수 있을까. 얼마나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을까!
편집장이 없는 잡지, 직원이 없는 잡지, 발행인이 없는 잡지, 마감이 없는 잡지. 다만 코디네이터와 함께 자유와 성찰을 나눌 줄 아는 글쟁이들만 있는 잡지.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만나는 고향 같은 시골, 내 밖으로 멀리 나올수록 만나는 잡지, 그처럼 두 개의 꿈은 각각의 존재 방식으로 오늘도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머릿속에 있던 잡생각들을 옮겨 놓았다. 모처럼 밖에서 던지는 눈총을 맞아 볼 기회를 주었다. 마치 아이를 놀이터로 보내는 듯이. 가벼워진 마음 자락이 세풀 행간에 내려앉았다. 가만히 보니 생각마다 많은 꽃망울을 안고 있다. 몇 개는 조만간 터질 듯싶다. 이 작은 몸에 참 많은 꽃망울을 달고 있으니 힘들기도 하겠다. 어느 덧 제 생각에 흠뻑 젖은 몸뚱이에 피곤한 기운이 돈다.
봉숭아나 나나… 이래서 사는 건 똑같다. (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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