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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이혼 후 맞이한 생신


 “나다. 왜 느그 누나들은 전화 한 통화 없다냐?"

4월초 아버지 생신날 아침, 이른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한 아버지의 첫 마디였다. 그렇잖아도 생신이고 해서 전화를 드리고 저녁에라도 갈까 했는데, 아침 일찍부터 독촉 전화를 받고 나니 오히려 맥이 풀렸다. 아버지의 전화내용인즉, 생일인데도 딸자식들이 전화 한 통화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신이라도 그렇지, 그 전날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아침 눈도 뜨기 전인데 전화를 할까 싶었다. 딸자식들에 대해 서운해하는 얘기를 들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지라, 일단 사태를 수습했다.

“아직 아침인디, 밥들 먹고 흐것제라. 쪼끄만 기달리씨요이.”


사람이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던가. 최근 몇 년 아버지를 보며 그 말을 실감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마치 아이들이 자기 생일 챙겨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듯. 가끔 누나들이 ‘엄마 아빠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내게 할 때면, 나는 농담으로 ‘내가 애 둘 키우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부모님은 지난 99년 10월 이른바 합의이혼을 하셨다. 회갑을 전후해 이뤄진 이혼이니 부르기 좋은 말로 황혼이혼인 셈이다. 나로선 아무리 봐도 늦은 이혼이라고 생각하는데….

스무 살 스물 한 살 때 중매로 만났다는 부모님은, 어른들 말로 하면 참 사주와 팔자가 안 맞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에 사시는 부모님은 대부분 싸우고 계셨다. 남원 장날만 되면 술고래가 되어 들어오시는 아버지와 이를 못 참고 내지르고 마는 어머니. 그런 싸움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남원 조산에 살 때도 그랬고, 대산면으로 들어가 살 때도 그랬다. 


84년 서울 상계동으로 가족이 이사와서도 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이른바 사춘기였다는 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부모님의 부부싸움과 함께 흘러갔고, 대학생활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무슨 싸움거리가 그리 많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길도 없었고, 어릴 때는 나를 비롯해 누이들은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울부짖는 것 외엔 달리 무엇을 할 수도 없었다. 한때는 막내 누이가 중학교 시절에 싸우는 부모님을 말리다가 정신을 놓아버린 때도 있었다. - 내 초등학교 시절 보았을 그 장면을 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도 부모님께 연민을 갖고 있지만, 그때의 부모님만은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그건 부모에 대한 연민과 누이에 대한 연민이 묘하게 부딪치는 대목이라서, 막내 누이가 조금 더 행복해질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도 하다. - 나 역시 부모님이 싸울 때면 한동안 말리기도 했고, 때론 내가 더 나서서 집안을 어질러 놓기도 했다. 한때 주변 어른들은 세월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틈은 넓게 벌어졌다.


누이 셋이 모두 결혼해서 아이를 1남 1녀씩 낳아 손자손녀가 여섯이 되었음에도, 예순이 가까워오는 나이임에도 부부싸움은 지속되었다. 그 싸움 끝에 어머니는 이혼을 요구했다. 이미 그 이전에 별거 상태였다. 

싸움의 원인이 어머니에게 있든 아버지에게 있든 그 원인은 이혼을 거론하는 상황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원인이 되었던 이제는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어져 버렸다. 만일 두 분을 함께 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이혼이 낫겠다고 판단했고 누이들과 상의해서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기로 했다. - 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이는 나였다. 집안 일에 대해 어머니는 내게 많은 걸 의존하셨다. 나의 인정 여부를 떠나 ‘여자는 어릴 때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따른다’는 말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니 이혼 역시 나와 많은 의논을 할 수밖에 없었다.


99년 10월 초. 내가 제주도로 취재를 떠났던 날, 부모님은 가정법원에서 이혼수속을 밟았다. 그 수속 중에도 법원에서 싸움을 했었다. 당시 갖고 있던 몇 푼 안 되는 재산을 똑같이 나눠 가진 후, 여동생은 어머니와 살고 아버지는 따로 혼자 살았다.


이혼 이후 부모님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삶을 꾸려나가셨다. 여자는 늙어서 혼자 살아도 남자는 늙어서 혼자 못 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의 삶엔 초라함과 쓸쓸함이 흘렀다. 아버지의 집 세간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남원에서 서울로 이사 왔을 때 마련했던 정도였다. 다행히 이혼 이전에도 손수 밥짓기를 곧잘 하신 지라 식사는 해 드셨다. 반찬은 시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가정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술은 끊이질 않았다.


“넘들 집들은 부모들이 싸우면, 자식들이 말리는데 우리 집은 자식들이 더하냐.”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이런 말을 곧잘 하곤 하셨다. 아버지 역시 싸우실 때마다 어머니가 이혼해 달라면 해준다고 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속내는 아니었음을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혼을 말렸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혹은 이런 말도 하셨다.

“내가 석곡 가면 이런 놈이 아닌데, 친구들 보기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향에도 못 하고….”


그런 부끄러움 이전에 아버지는 이 땅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가장으로서의 삶이 꾸려지길 바라셨다. 유능 여부를 떠나 가장이면 갖기를 원하는 할 ‘보편적인 것’, 권위들…. 결국은 허위의식인 그것들로 인해 아버지의 이혼 후의 삶은 불행했다. 가장의 자리를 잃어버린 당신이 갈 곳은 술집뿐이었다. 술이 몸 안에 차면 다시 그 허위의식을 불러들이고, 그 허위의식은 다시 술을 부르고…. 그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결국 축나는 것은 몸이요 정신이었다.


이혼은 어머니에겐 삶의 긍정적 변화를 불러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은 그늘로, 겨울로 내몰렸다. 함께 있으면 두 분 모두 불행하고, 이혼하면 한 분은 좀 더 나아졌는데 다른 한 분은 더욱 나빠지는 딜레마였다.

이혼을 하지 않고 두 분의 삶을 한 단계라고 나아질 수 있게 할 방법은 없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 가족 누구도 그 답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생신날 아침, 다시 한번 아버지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생신날 오후쯤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목동에 사는 둘째 누나가 점심때 다녀갔다고 했다. 둘째 누나는 아버지 생신인 줄 알고 아침 일찍 찰밥을 했는데,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갈까 하다가 점심 무렵에 왔다 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것 보라는 식으로 한 마디 했다.

“그래도 생일날 아침이 되니까 마음이 요상 흐드란께.”

혼자 사는 일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 안에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2001.4.)


<사진설명>
아버지가 30대를 보내셨던 남원시 대산면의 집 근처에 있는 밤나무. 2005년 당시 찾았을 당시에 페허가 돼 나무의 형체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