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붉게 푸르게 뚝뚝 지는 걸 본 적이 있다
머리털 한 가닥까지 다 풀어놓고
천길 벼랑으로 내달렸었다
나 오늘 그 노을을 다시 본다
직장에서 쫓겨나
초라한 제 얼굴 감추고자 서둘러 돌아서는
서른둘 사내의 등허리에서
저녁하늘에 첨벙첨벙 발을 담그는 그 노을을 다시 본다
시인 오봉옥은 '그 노을을 본다'에서 서른 둘 인생으로 해고 노동자를 붙잡았다. 지난 4월 부평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에 쓰러진 노동자 가운데도 “직장에서 쫓겨나 / 초라한 제 얼굴 감추고자 서둘러 돌아서는” 노동자들이 있었으리라. 아니 그곳에 있는 이들은 “초라한 얼굴”이 아니라 “분노에 찬 얼굴”이었으리라.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버린 “천길 벼랑”에 선 그 분노….
온 나무의 잎에 윤기를 덧칠하는 예절바른 4월의 햇살. 사무실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서른 둘의 사무노동자, 나는 다시 나의 좌표를 읽으려 한다.
겨울 찬바람에 뭉기적거리고, 새봄 꽃물결에 들떠 있다 잃어버린 나의 좌표. 다시 부유하는 그 한 점을 마음에 묶고 몸을 곧추 새우려 한다.
서른 둘.
서른의 평원에서 내게 그늘 같은, 혹은 쉼표 같은 구실을 하는 숫자 가운데 한 가지다. 그 어떤 객관도 치밀한 과학도 없는 그저 느낌으로 다가온 숫자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가 있다.
1월.
‘서른 즈음에’를 불렀던 노래 김광석은 서른 둘에 맞은 그 달에 이생에서의 삶을 접었다. 혹은 꺾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한 지기가 선물한 4집 앨범을 듣고는 뒤늦게 그의 존재에 반해 버렸던 나는, 살아 생전 그를 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로부터 수 년이 흘러 지금 내 나이 서른 둘이 되어도 그는 형이다. 새삼스레 죽은 이도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영혼은 서른 둘에 머물지라도 그의 추억은 여전히 자라고 있었다. 몸이 떠났다 해서 이별이 아님을. 떠난 사람은 남은 이들의 마음에서 남은 이들이 자란만큼 자란다는 것을. 비록 서른 두 해만큼의 이야기만 풀어내고 갔지만, 남은 이야기는 서른 두 해를 넘게 흐르지 않을까 싶다.
김광석의 서른 둘에서 잔잔한 향기를 맡는다. 내게 있다면 좋을 듯한 그런 향기. 생명을 넘어 생명처럼 자라는, 생명보다 더 푸른 그 감성의 빛깔들.
3월.
대학 2학년이 되었을 때 서른 두 살인 여기현 선생님을 만났다. 말로만 들었던 학술답사를 고민하다 불쑥 꺼냈을 때 몇 마디 던져주던 선생님. 어느 강의 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변경하자, 답답하다며 꾸짖었던 선생님. 선생님은 서른 둘의 나이에 어떤 마음으로 강단에 섰을까. 내가 만일 누군가의 앞에서 가르치는 이로서 서게 된다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방식을 학생들이 거부했을 때 나는 어떤 해법을 마련할 수 있을까. 토대도 없는 학과에 그래도 무엇인가 씨앗을 뿌리기를 바라며 기운을 돋아주었던 그때의 열정. 선생님의 서른 둘에서 난 열정을 그리워한다. 희망의 뿌리에 힘을 주는 건 늘 열정이었다.
6월.
96년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만났던 신혜선 선생님도 서른 둘이었다. 자유기고가. 두어 번 들어본 기억밖에 없었던 나는 그곳에서 내 글 선생을 만났다. 20여 명의 수강중생 남자라고는 나 혼자 일 때가 많았던 시절. 거기엔 책임이 필요했으리라. 한겨레라는 이름에 값하는 혹은 자유기고가라는 그 막막한 바다로 뛰어든 이들에게 길라잡이를 해주려면, 그것이 어디 실력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책임에 따르는 무게, 그만큼의 무게들. 스스로 버틸만한 무게를 가진 서른 둘의 삶. 그것은 서른 둘의 나이에 어떤 무게를 실어야 하는 지를 슬쩍 보여준 셈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동네 대항 방식으로 이어달리기 대회가 있었다. 동네에 20대 형들이 선수로 나섰는데, 모두들 어깨에 모래 가마니를 메고 달렸다. 그럼에도 형들은 무척 빨랐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난 그런 운동회가 사라진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고 보니, 어릴 적 보았던 동네 형들이 스무 살에 가졌던 그 무엇이 없었다. 마치 그땐 신기루를 보았다는 듯이 형들은 다시 나이를 먹어 저만치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에 머무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만큼 내 나이는 나보다 게을렀다.
넉 달을 보내고서야 서른 둘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된 이 봄날, 몇 가지 좌표를 다시 그린다. 그 좌표 위에서 내 안에 적당한 무게를 내재한 채 살고 싶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잡지’의 마이너스 1단계를 마련한다. 생명보다 오래가는 감성의 빛깔을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이에 맞는 적당한 무게를 채운다.
이렇게 스스로 외우는 주문 속에 살아왔다. 그 주문들이 내 마음 안에서 뭇별들로 자랐으면 싶다. 어둠이 든 선운사 빈 경내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 북두칠성 주변을 거닐던 그 뭇별들처럼. (2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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