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한 허무주의가 있다. 녀석이 언제부터 내 안에 기거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세상 돌아가는 시스템이 보인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을 것 같다. 내 30대와 40대가 미루어 짐작되고 - 그 짐작은 단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이긴 한데 그 어떤 경우가 오더라도 과히 나쁘지 않는, 또한 나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 사람들이 무엇을 중심으로 얘길 하는지 보이는 것 같고, 또한 그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혹 그런 일반적 법칙에 어긋나게 사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경우의 수로 인식하는 그런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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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야기> 편집장이 그만두었다. 개인사업으로 출판업에 뛰어들 모양이다. 그런데 그만두는 시기를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갔다. 사람들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나는 그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예측하는 최악의 두 가지 상황만 아니라면 그런 관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문제였다.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 편집장에게 예정보다 일찍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일차적인 결과는 뜻대로 되었다. 편집장은 그만 두었고, 8월호는 남은 기자 네 명이 만들기로 했다.
사장이며 편집장이며, 기타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게 되묻곤 했다.
“노정환, 너의 이해관계는 무엇이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
이 질문을 지표삼아 행동했다. 덕분에 상황이 끝난 다음에도 그 질문에 부끄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허탈했다. 어쩔 수 없이 화살을 날렸고, 그 화살이 과녁을 맞추었지만 허탈했다. 이유가 있었다.
당장 새로운 편집장을 뽑아야 할 상황인데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인맥이 없어서 추천할 만한 편집장을 찾는 일도 어렵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누가 와도 큰 무리가 없다 싶다. 아니 바라는 상은 있다. 글 쓰는 능력은 없더라도 전체를 코디해주고 잡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진 사람, 신념과 열정을 가진 이가 왔으면 싶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못 버틸 편집장은 없어 보인다. 외부에서 뽑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존심 상할 것도 없다. 내 시니컬은 간혹 섬뜩할 만큼 냉정하게 드러나는데, 지금이 그렇다.
올 들어 잡지 팀에서 얌전히 지냈다. 편집장과 싸울 일도 많았고, 사장과 의견 차이도 많았다. 다른 기자들의 글을 보면서 원론적으로 아닌 부분들도 보였다. 그러나 침묵했다. 배우는 중이라 생각했다. 내가 언제 교양지를 해 보았던가. 이 잡지는 시사지와 달라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침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기사에 대한, 취재에 관한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부정했다. 그렇게 타협해 왔다. 누군가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나서는 일은 없게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좌절했다. 내 속을 하나씩 비워내면서 다른 어떤 것도 채우지 못했다.
2.
지난달부터 <아름다운 재단>과 공동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아름다운 1%나눔. 작은이야기에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을 소개하고 문인 등에게 나눔에 관한 글을 기고 받아 싣는 꼭지다. 그런데 예상보다 이 캠페인을 펼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몇 달 전, 편집장이 처음 이 문제를 편집회의에 올렸을 때 다른 기자들은 반대했다. 결국 어찌 어찌해 몇 달이 지난 후에 마지막 협상자로 내가 나서게 되었다. 잡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재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원고 매수를 줄이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재단 쪽에서 이해심을 갖고 기다려주었다. 필자를 공동으로 선정하고, 진행을 함께 하다시피 했다.
첫 캠페인 원고가 들어가는 지난 달 마감 때, 재단 쪽에서 디자인에 대해 몇 가지 이견을 보내왔다. 이제 나는 재단과 디자이너와의 중간에 서게 되었다. 재단에서 요구하는 상황들을 조목조목 디자이너에게 설명하고는, 다시 디자이너가 생각했던 부분들을 재단에 알려 주었다. 이 상황에서는 재단 쪽 관계자와도 서로 얘기가 깔끔히 이해되지 못하고 넘어가야 했다.
훗날 듣기론 재단 쪽에서도 처음 의도한 만큼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나보다. 그래서 생각한다. 그냥 두었으면 재단과 함께 캠페인을 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중간에 나서서 캠페인을 추진한 것은 아닌가. 그러면 재단 역시 다른 잡지와 좀더 낫게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역시 부담스럽고 옹색한 모습으로 이 캠페인을 진행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이런 것까지를 극복해 가면서 뭔가를 진행해야 하는가!
3.
다시, 아버지의 병이 도졌다. 며칠 전부터 밤늦게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거신다. 그때마다 술을 한두 잔 마신 목소리였다. 지난 번 의사의 말로는 간경화로 간이 얼마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는데. 걱정보다도 화가 난다. 예순 넘은 어른이 자신의 몸 하나 가두지 못하나 싶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뚜렷한 답도 없다. 전화를 끊고 나면 복잡한 심정이 머릿속을 휘저어 놓지만, 결국 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만다.
어쩌면 나는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무심결에 놓아 버렸던 부모님 문제는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런데 난 무엇인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내가 집에서 나가는 게 상책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집으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라는 것뿐, 내 안에서 맴도는 모습은 매 한 가지다. 부모님과의 관계는 쉽지 않다. 아마도 나는 연민은 있으되 사랑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 쓰는 것까지가 예정된 가식처럼 느껴진다.
앞으로의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는 편한 것을 찾는 마음이 자라고 있다. 혹은 언제라도 작은이야기를 그만둘 수 있다는 오기도 아직은 뿌리가 건실하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허무주의가 자라고 있다. 기생하듯 어떤 생각 끝에라도 허무주의는 매달려 있다.
그럼에도 느낀다. 이 허무주의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일단 어떻게 하면 급한 소나기 피하듯 이 허무주의를 피하는 줄도 안다. 무엇이 근원적인 것이고 무엇이 허물 벗겨지듯 때가 지나면 벗겨지리란 것도 예감한다. 그렇다면 내 허무주의 안엔 오만함도 곁들여 사는 건가! 내 안에 한 허무주의가 자라고 있다. 녀석과의 동거는 이제 절정에 달했다. (2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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