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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비 온 하루, 어떤 ‘개인’을 생각하며


 

좌표도 없는 허공에서 만나

한 방울 비로 내리는 사랑아

너는 알았을 게다

흩어져 있다고 꿈들이 잦아든 건 아니지

떠돌고 있다고 인연마저 피할 순 없는 게지


아침부터 이슬비보다 가는 보슬비가 내렸습니다. 그토록 제 몸을 잘게 부술 수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잔비가 허공을 떠돌았습니다. 게 중에 서로 인연으로 만난 이들은 그 무게만큼 속도를 내 떨어집니다. 가벼운 비들은 머리카락에도 앉고 팔뚝 옷소매에도 앉습니다. 가로수들은 데이트 나가는 청춘들처럼 제 빛깔 돋을 만큼 물기를 머금었습니다.

어느 허공을 떠돌다 이렇게 내리는 것인지, 매년 이맘 때 쯤 그 장마 주기를 잊지 않고 제 주변에서 서성이는 비에게 새삼 놀랍니다. 때론 이처럼 깃털같이 몸을 가볍게 만들 재주도 부릴 줄 아는 이들이 마음에 잔잔한 유쾌함을 줍니다. 깃털 같은… 그렇군요. 보슬비 한 방울과 깃털 한 조각이 같은 무게로 엮여지는군요. 

보슬비가 어느새 그쳤나 싶었는데, 빗소리에 창밖을 보니 이제는 장대비로 바뀌었습니다. 마음도 비에 끌려 덩달아 바뀝니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먼저 흘러간다.

베란다 옆 감나무가 빗방울보다 큰 눈물 떨구며 건네는

인사를 받기도 전에 

마음은

비탈에 허술하게 놓인 흙더미가 비에 무너지듯

슬핏 허물어져 주저 없이 몸에서 흘러내린다.


비가 내리면

사랑이 떠나던 걸음보다 더 바삐

마음이 젖어든다

인연들의 매끄러운 팔뚝을 흘러,

앞가슴 위 작고 깜찍했던 단추 구멍 틈새로 

그 사이사이로 스며 깊이깊이 젖는다. 


비가 내리면

떠났던 것들이 되돌아온다. 

빗줄기 땅에 스밀 때 

젖을까 가슴에 품었던 네 편지가, 

빗줄기 땅을 밟고 어디론가 흘러갈 때

우산을 든 손목에 감겼던 온기가 되돌아온다.  


비가 내리면 

비보다 먼저 떠나는 마음은

비와 함께 되돌아 올,

그 마지막 손님을 마중 나가나보다.

사랑! 


어제 마신 술이 아직 몸속에 있습니다. 적당한 취기, 딱 이만큼이 좋습니다. 머리도 반쯤 비어있는 듯하고 몸도 조금은 쉬겠다고 가벼운 시위를 하는. 이런 날은 그저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내 건강에도, 지구 건강에도 좋을 듯 합니다. 

어제는 모처럼 지기들에게 전화 걸어 술 한잔 나누었습니다. 지기들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꿈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후배와는 몇 년 전부터 의미의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뜻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서로가 닫혀 있는 듯이 느껴질 겁니다. 딱 그만큼 마음이 아픕니다.


수많은 말을 나눴는데도 마침내는 마음 한 조각 나눌 수 없다니. 이 무슨 명목으로 벌어진 말 잔치의 씁쓸한 뒤 풍경입니까. 그토록 많은 말이 마음 한 조각 열어젖힐 여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디 눈에 보이는 물건들만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귓가에 쌓이는 말들이 가슴으로 흘러가지 못할 바에야, 머리에 내려앉지 못할 바에야 그 또한 쓰레기입니다. 이제 될 수 있는 한 말을 줄일 생각입니다.     


말하지 않아야겠다.

말이 말을 낳고, 말이 말을 딴죽 거는  

우주의 시간만큼 많은 말,

이제는 말의 숨통을 조여야겠다. 


오늘 

감잎 더듬는 빗소리에 돌아보니

어느새 엄지손가락만 했던 감 한 개 떨어지고

빈 깍지만 가지에 매달렸다.

봄 햇살을, 여름 바람을, 지난 가을 붉은 기억까지 담고 

또 한 세상을 품었던 꿈을

툭, 

떨구고도 한 마디 말이 없다니

… …


말 해야겠다.

할 말이 있거든 저 감나무처럼

선명하게, 단 한 마디의 몸으로 말해야겠다.


주변을 보니 말을 아껴야 할 무리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며칠 전엔 <조선일보> 기자 일동이 이구동성으로 “지금, 사방에서 언론을 옥죄어 오는 권력의 殺氣를 절감하고 있다”며 비명을 내질렀습니다.

“이제 권력의 저의는 명백해졌다. 그들이 우리로부터 앗아가려 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그들이 빼앗아 가려는 것은 바로 언론의 자유이고,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와 긍지이다. 권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문사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오만까지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우리 조선일보 기자들은 그 음모에 분연히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반드시 이겨 언론자유와 조선일보를 지킬 것이다.”


어느 한 명 반대하는 의견 없는 놀라운 단결력을 발휘한 ‘일동’의 말이고 보니 자못 경건해져야 할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 방 책상 앞에 걸린 빛바랜 신문 조각에 쓰인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정녕 기자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균형 감각을 온 몸에 바르고 정의, 사랑, 공동선, 시대정신을 먹고사는가. 그럴까? 그건 책 속의 글일 뿐이다. 박제된 이상일 뿐이다. 기자들은 아무리 외쳐도 바뀌지 않는 이 땅의 거짓과 위선에 대한 분노를 먹고산다. 짓밟힌 사람들의 절규와 눈물로 산다.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거대한 기득권’ 앞의 무력감, 그 절망으로 산다.”


김택근 시인(당시 <경향신문> 편집부장)이 99년 5월 <미디어오늘>에 쓴 글입니다. 세상 모든 양심과 도덕이 도둑질 당한다 해도 지켜야 할 영역 중의 하나가 기자정신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선, ‘절망’ 대신 ‘거대한 기득권’앞에서 무소불위로 사는 <조선일보> 기자 일동을 보니 숨이 막힙니다. 지난해 의사들에게 느꼈던 환멸 다음으로 온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합니다.


최근에 읽은 <세계와 미국>에 실린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마샤 레온이라는 한 여성은 나치스가 유태인 학살 정책을 추진하던 1941년 슬로바키아에 살았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외교관의 도움을 얻어 비자를 발급받아 나치스로부터 목숨을 구했습니다. 마샤 레온은 이 비자가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발급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987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그 비자가 불법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일본 외교관 스기하라 츠네 총영사 대리가 정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 불법비자를 발급한 것입니다. 2000년 4월 뉴욕에서는 이와 같은 사연을 담은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생명을 구한 비자들 : 정의로운 외교관들’

마샤 레온을 도운 스기하라 츠네 총영사 대리와 같은 일을 한 80여명의 남녀 외교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나치 점령 국가들의 대사관에 근무했던 이들은 자신의 지위와 가족의 안전을 무릎 쓰고 유태인들에게 불법 비자를 발행, 30만명의 유태인 목숨을 건진 이들입니다. 이 전시회에 참석한 한 외교관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신을 거역하는 인간과 함께 하기보다는 인간(의 권력)과 대립된 신과 함께 하고 싶었다.”


비는 여전히 내립니다. 내린 비의 양만큼 생각이 무거워졌습니다. <조선일보> 기자 일동의 언행을 보며 지난 세기 역사의 한 현장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외교관의 이야기를 쓴 이삼성 교수(가톨릭대)가 외교관들의 행동을 해석한 것이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국가권력의 비인도적 명령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약하기도 하고, 대체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놓인 사회적 상황일 때가 많다는 지적을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외교관들이야말로 이런 ‘개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 자기 성찰과 비판에 열려있는 사회와 정치양식을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다른 또 하나는 개인의 저항력은 약하지만, 바로 그 개인들이야말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적인 희망의 근거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 희망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개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자칭 1등신문이라는 <조선일보> 기자 일동에는 그런 개인이 없는지. “자신이 놓인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개인”이라면 현 상황을 그렇게 해석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명예와 긍지”를 가진 이들이라면 더욱 그런 얘기를 이구동성으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조선일보> 기자들 중 한 단 사람도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궁극적인 희망의 근거”인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게, 그 동안의 <조선일보> 행적 - 친일 전적이며, 독재정권에 대한 아부전력이며, 호시탐탐 색깔론을 유포하는 반 통일성 등등 - 에서 느끼는 좌절감보다 더 큰 비애입니다. 성찰하지 않는 개인이 없는 조직은 흐르는 개울이 아니라 고인 호수에 갇힌 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희끼리 닦고 문지르고 촉촉이 맞대다

나무를 바람을 건물을 만나면

제 몸을 부셔가며 정성껏 씻기던 비들


지금도 비는

지구를 말끔히 씻어줄 모양이다

씻긴 그 자리에

비처럼 사색 깊은 나무 한 그루 나길. (2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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