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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32와 12분의 8

 


진술의 과유불급

과유불급(過猶不及). 2심 마지막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2심 재판의 쟁점은 1심과는 달랐다. 2심은 출석요구서가 법에서 규정한 출정일 7일 이전에 내게 배달되었는가의 여부를 밝히는 게 쟁점이었다. 만일 7일 이전에 받지 않았다면, 법적으로 효력이 발휘되지 않으므로 내 사건 자체가 무효가 된다. 나는 자연스레 승소하게 된다.

검찰은 출석요구서를 받은 시점과 관련해 나름대로 자료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오늘 검찰은 등기 자료가 폐기되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사건 심리는 오늘로 마치고 다음번에 결심공판을 하겠다고 밝혔다.


과유불급은 이때부터 일어났다. 판사는 피고인인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망설였다. 대개 최후 변론할 시기를 미리 알아 그때 할 얘기를 준비하게 마련인데, 갑작스럽게 최후진술을 하게 됐다. 잠시 후 나는 이전에 검찰의 항소이유서에 대해 썼던 반론 몇 가지를 읽었다.


이것이 실수였다. 이번 2심은 아예 그런 항소이유를 따지고 말 것도 없이 이 사건 자체의 성립여부를 따졌으므로 그에 대한 얘기를 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엉뚱한 얘기를 하고 말았다. 도중에 변호사의 제지를 받고는 중단했지만 확실한 과유불급이었다. 내 딴엔 여전히 검찰이 항소한 사유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걸 강조했는데… 별 의미가 없는 말만 쏟아놓고 말았다. 2심 판결은 9월 24일인데 결과는 좋을 것 같다.
(2001.8.29.)



수염을 기르다

8월 들어 수염을 기르고 있다. 깎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구레나룻과 입가 주변의 수염들이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이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편집장은 길러 보라는 주문이다. 단행본 주간은 “노정환씨 수염 깎으면 나도 머리카락 확 잘라 버릴 거야”한다. 머리를 묶고 다니는 주간이 나 때문에 자를 일은 없어 보이지만 지지하는 목소리다.
다른 여직원들은 뭐라 말이 없다. 임종진은 ‘길러라’에 한 표다. 일일호프에서 만났던 분들은 ‘다르게 보인다’에 한 표다. 이 표는 긍정인지 부정인 확인할 길이 없는 표다. 반대표는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당장 “거 뭐, 그런 걸 기르고 그러냐. 깎아버려라”는 얘기부터 급기야 “좀 멋을 내고 다녀야지 애가 꾸밀 줄을 모르냐”는 얘기로 비약했다. 어머니는 “노씨 집안에 그렇게 수염이 나는 사람도 있냐”며 그냥 웃고 마신다.


오늘, 예전엔 자주 갔다가 요즘 한 참 뜸했던 한길식당에 들렀더니 아줌마 두 분이 웬 수염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그 중 한 아주머니 왈, “절에 들어갔다 왔어요?”한다.

이번 달 원고를 보내온 김지룡님은 수염을 깎았다며 이미지론을 적어 보냈다. 처음 책을 낼 때 뭔가 다르게 보이려는 출판사의 주문에 수염을 길렀는데, 그게 김지룡 이미지가 되어서 그동안 깎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런데 결국은 그 이미지가 김지룡이란 실체를 넘어 버렸다는 거였다. 나 역시 그 이미지 때문에 언제까지 수염을 기를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벌써 예감이 예사롭지 않다. (20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