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 속에서 통장을 한 개 찾았다. 97년 1월 학원 강사 생활을 할 당시 급여이체용 일반통장이었다. 말하자면 휴면 통장이다. 가장 최근에 쓴 게 99년 5월에 기차표 끊을 때였다. 그 후엔 이 통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잔액을 보니 8,712원이 찍혀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잔액을 찾기로 했다. 은행에 들러 해지하고 돈을 받으니 9,680원이다. 2년여 동안 8,712원에 대한 이자가 968원 붙었다. 그 이자가 신기해 내역을 들여다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3개월 만에 붙는 이자는 99년 6월 58원으로 시작된다. 이에 9월엔 91원, 12월엔 144원으로 껑충 뛰었다. 이후 올 3월까지 110원 대를 유지했다. 그런데 올 6월 이자가 95원으로 떨어졌고, 8월 14일 통장을 찾을 당시에 입금된 이자는 17원이었다. 마지막 이자를 계산한 시점이 9월보다 한 달 보름 정도 앞서서 찾아 적게 나온 지 모르겠지만, 원금이 그대로 있는데 갈수록 이자가 줄어드는 것이 요즘 은행들의 변화된 현실을 체감하는 듯 했다.
그 동안 모은 동전을 들고 환전하려 은행에 가려 하는데, 은행에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입이라곤 1원 한 푼도 발생하지 않는 이 환전을 은행이 곱게 받아줄까 싶었다. 이전엔 은행이 공공기관 같은 어떤 서비스 기관이란 개념이 있었다. 최근엔 은행 역시 수익을 내야하는 회사일 뿐이라는 생각이 미쳤다. 이런 생각은 내 생각만이 아니고 현실이다.
은행들이 올 9월부터 수수료 장사를 시작한단다. 어떤 은행은 카드 재발급 수수료를 현행 건당 1,000원에서 2,000원으로, 통장 재발행은 건당 1,500원에서 2,000원으로 각각 올린단다. 그밖에 기업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표 등은 수수료가 적지 않게 오른단다. 두어 달 전 1%나눔을 위해 주택은행에서 농협 통장으로 이체를 시키려 하는데 수수료가 900원이 나왔다. 얼마 되지 않는 돈에 그렇게 많이 붙은 수수료를 보고는 즉각 취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결국 그 돈은 인편으로 전달했다.
은행들의 수수료 인상을 두고 어떤 신문은 “은행의 개념이 ‘이자를 챙기는 곳’에서 ‘편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용료를 지불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몇 달 전엔 일반 통장에 은행 잔고가 일정 금액 이하로 들어 있으면 수수료를 물리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잘한 금액이 든 은행 통장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수수료가 수수수 빠져나가는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르겠다.
자본의 이익논리로 따지면 은행들의 이런 영업방침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는 최근 <한겨레21>에서 읽은 기사가 참 흥미롭다. 1년짜리 정기예금을 개설하는데, 통장개설비 인건비 등을 감안하면 은행에서 업무처리에 드는 비용은 1만4,250원이란다. 은행에서 정기예금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은 0.69% 수준. 그러니 100만원짜리 정기예금을 받더라도 은행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6,900원 정도다. 결과적으로 은행은 7,325원을 손해 보는 장사를 한 셈이다.
더욱이 이 기사엔 입출금 거래 한 건당 각각 934원, 1,150원의 업무처리비가 발생한다는 한 은행 직원의 얘기가 실렸다. 인용된 수치들은 주로 은행측 자료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이 기사대로라면 가급적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 게 국가 경제적으로 이득인 셈이다. 다만 기왕 자본주의 안에서 돈으로 돈 버는 회사를 운영할 바엔 좀 더 크게 놀지 못하고 서민들 주머니부터 뒤지는 방법을 생각하는 은행들이 조금 괘씸하긴 하다.
이런 기사를 읽고 은행에 환전할 동전을 들고 간 터라,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환전 창구에서 일반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사람 뒤에서 기다리며 이럴 바엔 아예 번호표 받아서 당당하게 통장에 입금한다고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얼마 벌지도 못하는 돈, 은행에 맡겨 이자 챙기겠다는 셈은 이제는 버려야 겠다. 이제는 내 돈 도둑맞지 않고 잘 보관해 준 은행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지? 당장 이 달에 통장 하나 개설해야 하는데. 돈을 동전으로 바꿔 마당에 돈 항아리를 묻어야 하나? (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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