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힘은 때론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장 취재를 갔다 온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한 직원이 물었다.
“노 기자님, 강의 하신다면서요?”
“예? 아… 예!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 나와 있잖아요. 신문에요.”
그 직원은 <문화일보>를 펼쳤다. 그곳엔 이숙경님의 사진과 함께 내공프로그램에 대한 기사가 박스로 실렸다. 그 직원은 다시 어제 <한겨레>를 꺼내더니 다른 기사도 보여 주었다. 그곳엔 한 술 더 떠 내 이름까지 실려 있었다.
“이런 건 회사 안에 널리 알려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사장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웃으면서 한 마디 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며칠 지난 뒤에 보니 몇몇 신문에서 이른바 아줌마 내공프로그램이라는 강좌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가운데 내 이름이 들어간 기사가 실린 신문은 <대한매일>, <한겨레>였다. 그 며칠 후에는 소설가 공선옥 누나와 통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어찌 기사를 읽었는지 신문에서 보았다면서 “뭔 아줌마들을 가르친다냐?”하며 아는 체 했다.
네다섯 달 전이었다. 지난해 제주인권학술회의 때 만났던 로리주희님으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고 전화 통화도 뜸하게 하던 사이라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역시 제주 학술회의에서 만났던 서울시립대 이숙경 선생님, 초면인 월간 양쥬 김영미 편집장도 함께 해 넷이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아줌마 내공 프로그램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숙경님과 로리주희님은 그 당시엔 출판 기획가인 김형수씨가 운영하는 미지로문화센터에 기획팀 자리를 얻어 일하고 있던 차였다. 그 일은 거창하게 표현하면 아줌마운동 쯤으로 말할 법했다. 그 세부 안으로 두 강좌를 개설했는데, 마음의 힘 기르기반과 자유기고가 반이었다. 이날 자리에서 두 분은 양쥬 편집장과 함께 나에게 자유기고가 반 강의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 만남 전에 몇 차례 자유기고가반 강좌를 어떻게 기획하면 좋을 지에 대한 의견 정도는 말해 준적이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내 힘만큼 도와주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강의 제안은 예상 못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잠시 생각하다가 하겠다고 했다.
3년 전쯤 캠라에 있을 때, 신혜선 선생님을 도와 한겨레문화센터의 자유기고가반 강좌를 기획해본 적이 있었다. 그 기획안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채택되기도 했다. 그 경험이 내가 쾌히 강의를 맡겠다는 답변을 내 놓을 수 있게 했다. 또한 3년 전에 <한겨레>에서 개설해 신혜선 선생님이 진행하는 자유기고가반 강좌에 강사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때 강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수강생들과의 만남이 재밌기도 해 이번에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남 이후, 넷이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강의 커리큘럼을 작성했다.
강의를 두어 주 앞둔 어느 날 다시 넷이서 모였다. 프로그램 진행에 차질이 발생했다. 미지로 강좌가 폐강되었다. 미지로 아카데미는 그 동안 소설 창작 사진 강좌 등을 중심으로 해서 진행했는데 경제적 적자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자유기고반 강좌를 없애기로 했단다.
내공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숙경님과 로리주희님은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두 분은 애초 여성운동 쪽에서 일해 왔다. 이숙경님은 <여성신문>사에서 운영하는 웹진 <아줌마> 편집장을 맡고 있었다. 최근엔 <담배 피우는 아줌마>를 펴냈다. 몇몇 방송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아줌마 운동을 대중화하는 일도 맡고 있다. 더욱이 월경페스티벌로 알려진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배후’에서 함께 했다. 로리주희님은 이전에 여성연합에서 일을 해왔다. 이후 잠시 쉬다가 아줌마 운동을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자체적으로 강의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숙경님은 줌마넷 편집장을 그만두고 별도로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를 근거지삼아 8월 말부터 내공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어차피 미지로의 힘은 신문광고를 낼 수 있다는 것 정도인데, 그것 없다고 내공프로그램을 포기하긴 들인 공이 아까웠단다.
내공프로그램은 여성으로 살면서 “아주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서운함, 아주 오랫동안 칭찬받지 못한 억울함, 아주 오랫동안 존중받지 못한 서러움” 등을 깨고 “진정으로 웃거나 울거나 춤을 추며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을 기르자는 운동이다. 그 힘이 ‘내공’이고 그 내공을 찾는 길이 내공프로그램이다.
3년 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대학내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그 외적인 성과가 올 9월 8일로 3회째 맞는 월경페스티벌이다. 한편으로는 ‘문화현장탐사’를 위주로 한 아줌마 내공프로그램도 진행됐는데, 그 성과는 <여성신문>사에서 발행한 웹진 <아줌마>였다. 2001 내공프로그램은 이런 바탕 위에서 ‘마음의 힘 기르기’와 ‘글쓰기로 돈 버는 힘 기르기’(자유기고가 반) 두 강좌 형태로 마련됐다.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내공프로그램에 남성인 내가 어떻게 섭외대상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분들과 조금 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면 물어봤을 텐데, 막바지에 이르러선 서로들 바빠 그럴 기회가 없었다. 다만 나는 지리멸렬한 마음으로나마 여성운동을 지지했던 터라 ‘여성운동’의 시각으로 마련된 이 프로그램에 나름대로 공감 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을 이렇게라도 해보고 싶기는 했다. 그것이 ‘운동’으로서 이번 일을 맡게 된 이유다.
3개월 과정으로 진행하는 자유기고가반 강의에서 내가 맡을 부분은, 취재일반(2강)과 르포 등 기사 쓰기(2회), 기획안 작성 및 실습(2회) 였다. 전체적인 강의 그림은 ‘매체에 맞는 글쓰기’였다. 이는 김영미 편집장이 제안한 바이기도 했고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그 동안 내 경험에서 느낀 바는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도 매체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매체에 맞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말>에 <작은이야기> 스타일의 글(기획)이 맞지 않듯이, 여성지에도 <말> 스타일의 글(기획)은 또한 어울리지 않는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샘플로 취재론(3,4강) 요약본을 보내야 했다. 요약본을 보내려면 어차피 강의록을 작성하는 게 나을 듯해, 휴일을 이용해 강의록을 작성했다. 처음엔 다른 유사 강의들을 보면서 내용을 참조했는데, 그 틀에 맞춰 내 글을 쓰자니 갑갑해 포기했다. 일단 자료를 덮고는 내가 취재하던 때를 떠올리며 과정을 잡았다. 자유기고가들이 취재할 때 알아야 할 내용이 열여섯 가지로 정리되었다.
내용을 정리하다보니까 글이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류의 글투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생각한 게 취재에세이를 쓰자는 거였다. 가능한 취재에 대한 강의 내용을 모두 담되 글투를 에세이식으로 정리하자는 것. 아울러 그 안에 내 경험 사례를 충분히 넣자는 것. 그 정도 방향을 정하고 나니 강의안 정리하기가 조금 더 편해졌다. 간간이 조사 자료를 첨부해, 내 경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강의가 목요일 오후에 진행되는 터라 근무시간을 빼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다.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회사에는 비밀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양심까지 찔리지는 않았다. 직장인들이 자기계발 특히 직업과 관련 있는 외부 일을 맡을 때는 회사에서 어느 정도 지원, 지지를 해주는 것이야말로 회사와 개인이 윈윈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기자들의 경우는 자유로운 활동은 ‘필수’다. 기자란 직․간접적인 취재가 생명인데, 취재란 곧 사람을 만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 사무실에서 인터넷 서핑 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 친구라도 만나 수다를 떠는 게 득이다. 본 업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외고를 쓰는 일도 필요하다. 한 매체에 갇혀 글을 쓴다는 게 자칫 기자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할 수 있는데 그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으로 회사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됐다. 다른 기자의 일이라면 옆에서 지원사격이라도 해줄 텐데, 내 일인지라 그러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이런 고민은 신문기사가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나보다 먼저 남들에게 얘기를 해줬으니. 기사가 실리기 며칠 전 사진취재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신문에 기사가 실린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내 이름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일은 알려졌고, 편집장에게만 얘기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편집장이 사장에서 보고를 할지 말지는 내 선을 떠난 문제라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근무시간이라 못하게 한다면, 연차를 쪼개 쓰든가 할 생각이다. 어차피 한 달에 두 번이니까.
강의를 앞두고 한 다짐은 ‘청출어람청어람’이다. 내 글 선생인 신혜선 선생님보다 강의를 더 잘 하자는 다짐이다. 개인적으로 신혜선 선생님은 내게 참 고마운 분이다. 한겨레 문화센터 인연부터, <캠퍼스라이프>, <말>까지. 요즘에도 가끔 내가 아쉬울 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곤 한다. 그러니 늘 선생과 선배란 넘어야 할 산의 이정표이기 때문에 청어람은 당연하다. 공교롭게 지금 내 나이도 서른둘이고, 당시 내게 자유기고가반 강의를 하던 신 선생님도 서른둘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때의 선생님보다 더 잘 해야 한다.
8월 30일 첫 강의가 신촌 <또 하나의 문화> 사무실에서 시작되었다. 수강생들 얼굴도 보고 간단히 인사라고 할 겸 잠시 들렀다. 하루 전 김영미 편집장과 만나 강의안을 최종 점검할 때만 해도 수강생이 다섯 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30일 강의실에 갔을 때, 그곳엔 결석한 몇 명을 빼고 11명의 아줌마들이 있었다. 난 그 11명의 아줌마들을 전사라 부를 생각이다. 지금은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확인해 가는 작업이 내가 이 내공프로그램에서 할 또 하나의 몫이 아닐까 싶다. (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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