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노을이가 늘 입에 달고 있던 연애 이야기를 해 보자. 최근에 이별을 겪었는데 상대방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나.
“호기심 충족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연애만큼 프라이버시적 성격이 강한 것도 없다. 상대방의 사생활을 위해서라도 그건 말할 수 없다. 누구랑 연애를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추측의 확률을 반으로 줄일 만한 힌트 하나만 남기자면 남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하하.”
- 헤어지고 난 후 지금 느낌이 어떤가.
“솔직히 말하면 차였다. 헤어진 게 아니라 헤어짐을 당했다. 떠나보낸 게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떠났다. 그러니 느낌이란 게 좋을 리 있겠는가. 한 2주 정도 방황하고 고민했다. 헤어지자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지 말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다만 붙잡을 지 말 지를 고민하는데 그치지 않고 내 연애관까지 본 점은 다행이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문제는 연애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내 연애관의 입장에서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 결과 잡아야 한다면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아마 실패했을 가능성이 많겠지만. 아무튼 그 틀에서 이별을 받아들였다.”
- 그렇다면 헤어진 인연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다는 얘기인가?
“미련은 있다. 나를 온전히 주는 게 사랑이다. 그 인연을 ‘사랑’했는데, 헤어지자고 하니 어찌 미련이 없겠는가. 마음이 아프다.”
- 지금은 연애관이 정립되었나? 그렇다면 이번 인연과의 이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그 인연을 잡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떠난 인연에게 내가 절실했다면 나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연은 떠났고 그만큼 나는 그 인연에겐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 인연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그 인연의 마음엔 내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나름대로 결론 내린 이번 이별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 얘기했던 연애에 대한 지론을 생각했다. 그 지론에 따라, 이런 상황에서 떠나는 인연은 잡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 그 평소 지론이란 게 무엇인가.
“이를테면 결혼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보내야 한다는 것. 즉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것이다. 이번 인연 역시 여기까지가 인연이었다. 그러니 떠나는 인연을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아울러 떠난 사람의 몸을 붙잡고 애원해봤자 마음이 이미 아닌 상황에서 행복이란 요원한 일 아닌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인연과 헤어져도 이혼하는 부부의 마음보다는 절실하지 않는 문제일 거라고. 물론 상대적인 기준으로 연애의 깊이를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 지금 얘기는 무척 이성적으로 들린다. 연애라는 게 이성의 영역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게 내 장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감정적으로는 힘든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해결된 사안에는 감정이 말을 잘 듣는다. 다른 면에로 보면, 인연이 떠난 이유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 나로선 잡을 명분이 없다. 그러니 보낼 수밖에. 지난번 잡지팀 모꼬지에서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가 그런 거였다. 온전히 사랑한다면 당연히 떠나보내야 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는 온전히 사랑하고 안하고의 문제보다는 한 인간이 가진 마음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어떤 일이라도 옳지 못하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로 했다.”
- 노을이에겐 남녀간의 사랑보다 자유가 우선하는가. 또한 사랑과 자유는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랑과 자유. 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대비가 명확히 만나는 지점이 있다. 아래 글은 작은이야기 9월호에 실린 내용의 한 부분이다.
‘누군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얼까? 떠도는 바람처럼 인생의 수많은 기회와 여러 갈래 길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을 바람처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글쓴이는 결혼한 여성인데, 남편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글쓴이는 여전히 그 사람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아주 아픈 상태에서 쓴 글이다. 나는 그 많은 인연의 기회에 기꺼이 응할 수 있는 게 자유라고 생각한다. 내게서 떠난 인연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그런 자유를 갈구하는 측면이 강하다. 본인이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결혼제도 가족제도가 가진 최소한의 도덕성을 말하며 내 생각을 우려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이고 남편이고(부인이고) 다 버려두고 바람이나 피우란 말이냐’하고 말이다. 그 우려를 이해하지만, 사랑과 자유는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내 문제로 제한해 정리하면 이렇다. ‘결혼도 안한 인연이 마음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나를 떠나겠다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막는 일은 그 영혼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이다.’”
-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 설명으로 보면 사랑과 자유는 대립돼 보인다. 남녀관계에서 자유는 사랑을 깰 것 같은 것처럼 인식된다.
“그건 영원한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자유는 사랑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내 영혼이 자유로운데 사랑이 어찌 깊어지지 않겠는가. 그것은 내가 결혼하게 되면 실제로 가꾸어 볼 생각이다. 결혼이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만들지만,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자유는 사랑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온전히 세우는 힘이다.”
- 연애이야기를 좀 더 하되 소재를 약간만 바꾸자. 그 인연과의 이별 이후 연애와 사랑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었을 텐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여자나 남자나 서른은 넘어 결혼을 생각했으면 싶었다. 지난번 여동생을 만나 그렇게 얘기했다. 스물여덟인 그 녀석도 아직까지 결혼을 염두해 두지 않고 있던데, 연애는 많이 해보더라도 결혼은 서른 넘어서 하라고. 또한 혼자 살 결심을 할 거라면 경제적 독립은 반드시 이루라는 말도 했다.”
- 노을이는 혼자 살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는가?
“그것 역시 ‘혼자 산다’ ‘결혼 한다’로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결혼은 ‘할 수도 있다’이지 ‘꼭 해야 한다’는 아니다. 다만, 요즘엔 결혼한다면 왜 하는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은 들었다. ‘사랑하니까 결혼한다’는 진부한 아유다. 그건 기본일 뿐이다. 그 기본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사람이랑 결혼해서 뭐 할 건데?”라는 질문에도 답이 필요하다. 보통은 가정을 이뤄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게 답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내 경우엔 뭘까 고민 중이다. 결혼하는 이유 역시 백인백색일 수 있지만, 누구나 자신이 왜 결혼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만일 내가 알콩달콩한 가정을 원했다면 지금이라도 선을 보면 된다. 그 정도라면 쉽게 결혼할 수 있다. 가장이 아니라 아빠의 몫까지도 자신 있으니까.
지금 생각엔 꿈을 함께 가꿔가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게 결혼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삶의 속도, 방향, 감성에 대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찾게 되는 것 같다.”
- 대화가 통하는 사람?
“삶의 속도 방향, 감성이 나와 ‘똑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은 그 영혼의 다양성을 파괴할 여지가 있어 그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점에 대해 ‘똑같진’ 않도러도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서로가 기꺼이 양보하고 타협할 여지를 지닌 사람이 아니겠는가!”
- 그것이 결혼 상대자에게 요구하는 전부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눈이 높다. 내 능력은 별로 내세울 게 없지만, 이른바 예쁜 여자를 찾는다. 예쁘지 않으면 내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하긴 이것도 모르겠다. 아무튼 미스코리아를 찾는 건 아니지만, 예쁜 여자다. - 그런데 내가 가진 예쁘다는 기준이 좀 독특하긴 한 것 같다. 뭐 이건 속물근성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집에서 살림하겠다는 여자는 싫다. 돈벌이와 관계없이 밖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집안은 지금 내가 청소하는 정도면 되고, 요리도 조만간 내가 배워볼 생각도 있으니 가사는 나와 분담하면 된다. 대신 나 역시 여자가 차려주는 밥 먹어보려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문제는 진실로 신중하게 결정했으면 좋겠다. 남들 낳으니까, 주변에서 눈총주니까, 삶이 팍팍하니까가 아니라 진정으로 필요한지를 심사숙고하고, 낳는다면 그 아이를 위해 부부가 함께 진정한 엄마 아빠 몫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낳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만큼 더 노력할 수 있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물론 안 낳는다면 좋겠다. 그러나 출산은 원칙이 아니라 논의의 대상이다.
또… 음… 아까 말한 사랑과 자유의 상생관계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여자면 좋겠다. 그리고… 평화와 인권 생태에 대한 감성적 이해가 깊었으면 좋겠다. 이들 단어가 주는 어감이 무겁긴 하지만 거창한 걸 말하는 건 아니다. 평화란 미국이 테러를 막겠다고 그보다 더한 전쟁을 추진하는 일에 반대할 수 있는 정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서명에 참여할 수 있는 의식이면 된다. 나 역시 그 정도 밖에 안 되지만. 말과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지금은 모르더라도 나중에 알고 이해하게 되면 작은 일이라도 실천할 줄 아는 사람 말이다. 또한 이전에 권혁범 교수가 말한 주례사의 조건에 동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허나 어찌 알겠는가. 내일 당장 퇴근길에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어 모든 조건 포기하고 스스로 감옥 안으로 들어갈 지. 그러니 이 모든 것이 믿거나말거나 일지 모르겠다.”
- 노을이 얘기 듣고 있다 보면 “여보세요 희망사항이 참 거창하군요. 나는 그런 남자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좋더라”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그런 조건을 요구하는 노을이는 그런 인연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해주는 것’은 없다. 지금처럼 살 뿐이다. 굳이 질문의 의미를 해석해 말하자면, 가부장적 사회가 만든 가장의 몫은 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그런 몫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 이른바 전업주부의 몫을 내가 할 수도 있다. 남자가 아이 낳을 수 있냐고? 앞서 말했다. 그래서 신중하자고. 혹 여자가 경제적 수입을 맡는다 해도 그것 때문에 현재의 경쟁사회에 무의식적으로 편입되지 않길 바란다. 이런, 다시 내 희망사항으로 돌아왔다.”
- 이번에 떠난 인연이 그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나.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을 얘기해볼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몇 가지 부정적인 모습이 있음에도 ‘삶의 속도와 꿈의 방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된다.”
- 노을이처럼 머리를 굴리지 않고도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괜히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 전 후배가 결혼했다. 참 보기 좋았고 그 후배가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으면서 정말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그래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들 부부는 잘 살 거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관념일 수도 있는데, 내가 하는 결혼은 내 선택이다. 그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시 한번 말해두고 싶은 건 사랑은 결혼으로 맺어질 수 있지만, 결혼으로만 맺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결혼은 반드시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역시 앞서 말한 필자가 쓴 글을 인용한다.
‘결혼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적령기’에 만난 사람 중에서 선택하는 것 아닌가?’
나 역시 이 질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 희망사항도 결국 그 ‘적령기’에 걸려 모두 밀쳐둘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내 안에서 포기하는 이유를 반드시 묻고 물어 몇 번 다짐받아 둘 생각이다.”
- 그럼 이제 다시 그런 희망사항에 맞는 사람을 찾을 것인가? 노을이는 결혼 적령기는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고민 중이다. 이 참에 ‘깔끔한 플레이보이’로 나설 지를. 그 동안은 여자를 만나면서 내 스스로 일정 정도 방어벽을 쳐 두었는데 그걸 해지할 지를 고민하고 있다.”
- ‘깔끔한 플레이보이’란 뭔가?
“아마 이후엔 기회가 되는 대로 많은 여자들을 만날 것이다. 처음부터 방어벽을 만들어 두고 만나지는 않겠다. 흐름에 몸을 맡겨 볼 생각이다. 그러나 감정을 낭비하거나 사치스럽게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딜레마다. 플레이보이의 조건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상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게 ‘깔끔한 플레이보이’다. 나와 남을 속이지 말 것. 둘 중 분명히 한 쪽이 원하지 않으면 관계를 진전시키지 말 것, 뭐 그런 원칙을 가진 플레이보이 말이다. 하하하. 재밌다. 근데 이런 게 있긴 있는 거냐? 지금 연애 판타지 쓰는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란 사회가 만든 것이니 이미 지난 것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적령기는 나이가 아니다.”
- 얘기를 이쯤에서 정리하자. 계속 인터뷰하면 노을이의 면면이 모두 드러나 사회생활하기 힘들겠다. 내가 특종 욕심이 없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마지막으로 떠난 인연에게 해줄 말이 있나?
“대학교 때 좋다고 쫓아다닌 여자가 있었다. 한 1년 연앤지 뭔지 모르고 만났는데, 결국 차였다. 참 그러고 보니 내 삶이 축구공 같네. 아무튼 그 여자와 헤어졌는데, 한 1년 정도 얘기를 안 했다. 그러다 1년 정도 지난 다음 만났다. 깔끔했다. 그때는 마음 비우는데 한 1년이 걸린 것 같다. 이번 인연은 그 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될 것이다. 내공이 쌓인 덕분인지 몰라도 내일 만나도 더 잘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욕심이 없으니 소유욕이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하하. 내가 조만간 신이 될 모양이다.”
노을이와 진행된 셀프인터뷰는 며칠에 걸쳐 이뤄졌다. 마지막 정리하는 대목에서는 밤 1시 40분까지 이어졌다. 인터뷰를 나누다 보니 말이 끊이질 않았다. 할 말이 많았나 보다. 그러면서 마음 안에 잔잔한 미동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말은 말뿐인가? 그래서 이 셀프인터뷰의 내용은 딱 반만 믿어야 할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정리된 글을 읽고난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미 노을이의 맘 속에 내린 깊은 가을이 잘 여물길 기원한다.
“일이든 결혼이든 결국은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들 아닐까 싶다. 일은 그런 방편이고, 연애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근본이유일 텐데, 많은 부분들이 그 원석을 가리고 있다. 일은 내가 즐거우면 되는 것인데, 자본이 보다 중요한 선택의 조건이 되면서 ‘즐거움’이란 기준을 잃어버렸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원석의 본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자본주의적인 이슈에서 관심을 놓지 않을 것이다. 최근 어떤 지기가 돈을 벌어 놓지 못함을 후회하기도 했는데, 나 역시 그런 문제에 부딪히면 대책이 없긴 하다. 그래서 내 삶의 진정한 고민은 이제 막 고개를 오르고 있다.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그럼에도 직업으로서의 일은 우선 내가 즐거워야 한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혼이라 불리기 이전에 사람과의 만남으로 보면 좋을 듯싶다. 그게 남자면 좋은 벗이 되는 것이고 여자면 함께 살게 된다. 동거든 결혼이든 그것은 두 사람이 합의한 생활형태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 한 생을 살다 가는 게 삶이다. 아무리 종교가 일상의 위에 있는 거라지만,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려고 살다 간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또한 내 삶이 윤회 하더라도 자유롭게 산 영혼의 이후 삶이 어찌 팍팍한 고난으로 피어나겠는가!
지금 내 의식은 이만큼 와 있는데, 아직도 어떤 벽 하나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벽만 넘으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내가 자유로운 만큼 아름다운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1인치가 모자란다. 그런데 1인치가 보통 큰 수치가 아닌 것 같다. 오죽하면 그 1인치를 찾았다고 광고까지 했을까.” (2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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