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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이별하는 법


 

하필… 가을입니다. 한 인연이 떠나는 계절이. 진득이 살려 해도 아침 바람에 휘청거리고 저녁 어스름 기운에도 마음 한 가닥이 푹 꺾이는 이 계절, 하필이면 가을에 인연이 떠나갑니다.

사람이 떠나니 떠난 만큼 빈 공간에 가을이 촘촘히 쌓입니다. 쌓여도 풍족함보다는 허전함이 더 진한 가을인지라, 마음은 결결이 메말라갑니다. 뭐라 말하기 힘든 팽팽한 긴장감이 에도는 듯도 하고, 그 무엇을 위한 씨앗 한 톨 남기지 않은 채 대책 없이 비워버린 겨울나무 같기도 합니다. 가을에 서둘러 채비를 갖춘 겨울나무라니….  


인연이 떠나고 난 후, 나는 나만 바라봅니다. 혹시나 상처받을까 싶어. 그러지 말기를 바라며 나만 바라봅니다. 가을이니까. 너, 무너지면 끝없이 추락할 수 있다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부러 속살을 뒤집는 음악을 틀어놓고는 나만 바라봅니다.

이렇게 부셔지지는 말아라.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말고 그 고통이 어떤 빛깔인지 차분히 바라보아라.

그렇게 다독입니다. 헤어진다는 게 꼭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기에. 지금 비워지는 공간만큼 다른 무엇이 채워질 것이므로. 그래 비워지는 마음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얼마나 깊게 패이고 얼마나 넓게 빈 그림자로 가려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별만큼 내 맘을 잘 닦아내는 세척제도 없으니까요.


다행히… 마음 안에 동요가 없습니다.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많이 다쳐서인지 오히려 평온할 따름입니다. 무엇을 잃었을까 굳이 계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인연이란, 더욱이 온 마음을 쏟는 사랑이란 그 하루하루를 간곡히 바치지 않고서는 이뤄지지 않는 것인걸. 그 하루하루가 이 생 내 삶의, 내 생명의 조각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값을 따져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바칠만한 의미가 있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옛 된 추억을 끄집어내 해부하는 일만큼 잔혹한 일입니다.


다만, 어제의 나는 나에게 충실했을 것이라는 내 안의 믿음 역시 동요하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제를 믿지 못하면 오늘의 나마저 존재를 잃고 무한히 헤맬 터이니 말입니다.

지금의 나에게 속삭입니다. 잘 했다고. 그 첫날의 만남을 맞이하는데 머뭇거리지 않고 다가선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상처는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삶의 조각조각이 상처일 수도 있지만, 또한 그 무엇도 상처로만 남는 것은 없습니다. 삶의 어느 시간이 상처 없이 흐를 것이며, 어떤 삶이 상처 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성장도 상처로부터 비롯되고, 죽음 또한 상처로부터 자라는 것. 그러니 결국 상처는 삶입니다. 잠시 가슴이 아리다가 세월이 덧붙어 곪아진다 해도 그건 그것일 뿐입니다.


스산한 가을바람 한 줄기 휑하니 휘젓고 간 빈 가슴에, 누구도 채우지 못할 그 기분을 상처라고 부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내 안이 잘 보이는 것을. 그때는 또 다른 무엇, 간혹 낯설어 머뭇거리게 하지만 그 무엇이 나를 찾아온 것일 뿐입니다.  


사랑은 솔직합니다. 마음이 가지 않는 인연에게 마지못해 간 사랑은 결국 스스로 외로워 사그라지고 맙니다. 늦게나마 제 갈 길이 아님을 안 사랑은 함께 간 길이 아무리 길다 해도 반드시 되돌아갑니다. 그만큼 솔직합니다. 그래서 동정도 연민도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위장된 사랑은 끝내 본색을 드러내게 마련이고, 제 원초적 기억이 그리워 발길을 돌립니다.


사랑은 그만큼 솔직합니다. 인연의 많은 부분을 다 얻어도 결국 마음을 받지 못하면 사랑은 이내 시들고 맙니다. 마음 없이 온 사랑은 제 마음이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사랑을 아쉬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새롭게 싹을 피워 풍성한 그늘을 만들든, 빈 바람에도 제 살을 뚝뚝 부러뜨릴 정도로 안으로 말라 스스로 무너지는 나무가 되든, 사랑은 변합니다. 


뼈아픈 각인이지만 사랑이 떠남으로 해서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기도 하는 건, 그 움직임의 폭만큼 그 비운 깊이만큼이 내 안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여 떠난 인연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남은 사랑은 씁쓸하고 쓸쓸하겠지만, 떠난 사랑은 다른 어떤 인연을 찾아 안착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인연 안에서 움직이든 다른 인연을 찾아 움직이든 움직이고 변하는 게 사랑일 겁니다. 영원한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면 일순간의 사랑도 충분히 현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그 인연을 깔끔히 보내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내 안에 내공이 덜 쌓였기 때문입니다. 감나무 한 줄기에 잠시 머물다 꽃을 피우고 떠난 봄 햇살처럼 가뿐히 떠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사랑은 인연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인연의 마음에 핀 꽃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 가을, 큰 열매 한 개를 얻었습니다. 대가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고이 간직해야 할 열매입니다. 이것이 떠난 인연이 남긴 하나이자 전부인, 그리고 마지막 속삭임입니다. (2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