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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정체성, 포지션 - 셀프인터뷰③


 

정체성. 셀프인터뷰 두 번째 주제는 ‘정체성’을 택했다. 항상 무슨 일이든 그것에 대해 궁금할 ‘때’와 ‘이유’가 있다.

요즘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퇴근길에 쌀쌀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럴 때마다 ‘나’란 존재가 조금씩 보인다. 그럴 때 간혹 비치는 내 안의 나를 조금은 여유있게 바라보고 싶었다. 그 과정이 서른둘의 노을이 정체성 찾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다. 정체성이란 단어를 검색했는데, 내용이 대부분 정치 이야기다. 다행히 신문 검색을 통해 유용한 자료를 한 가지 얻었다. 한 심리학 교수가 9.11 미국 테러 이후 정체성을 근간에 두고 미국과 아프카니스탄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부분이다.


“인간에게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정체성이 있다. 첫째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정체성으로서 한 개인을 다른 개인으로부터 구분시켜주는 독특한 내적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둘째는 사회적인 집단 정체성으로서 나는 ‘남자’이고 ‘충청도 사람’이고 ‘한국인’이라는 식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경우이다. 마지막으로는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시켜 주는 인간적 혹은 영적 정체성이 있다. 이런 세 가지 정체성은 한 개인에게 모두 존재하고 있지만 어느 정체성이 특별히 우세하느냐는 그가 속한 문화에 의해 많이 결정된다.”(문화일보  2001-09-27)


이 글에 의한다면 내 정체성 찾기는 주로 첫째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한 개인을 다른 개인으로부터 구분시켜주는 독특한 내적 속성’ 말이다.


-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반갑다. 이번 셀프인터뷰는 지난 달에 이어지는 것이니, 우선 지난달 셀프 인터뷰 후의 소감을 묻고 간단히 싶다.

“한번쯤 자신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셀프인터뷰를 끝내고나서 역시 나는 조금 변했다. 그러니 더욱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겨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특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 좋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두 번째 셀프인터뷰에 들어가 보기로 하자. 우선 전체적으로 어떻게 진행 할 것인지를 얘기해 달라.

“개인의 정체성을 말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다. 우선 정체성을 얘기하고자 했을 때, 성적 정체성과 사회적(정치적) 정체성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러니 우선 그 두 이야기를 하고 좀 더 다른 영역들을 얘기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 논의하기로 하자.”

- 성적 정체성이라 흥미가 당기는 얘깃거리다. 그러나 노을이는 남성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성적 정체성을 찾는다는 게 우스운 것 아닌가.

“내 안의 여성성. 뭐 그런 거다. 이전에 하리수씨가 한창 세간에 화제가 되었을 때 <한겨레21>이 ‘N개의 성’이란 제목이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사람들을 단순히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남성 중에도 여성성을 가진 사람이 있고, 여성 안에도 남성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이성이나 동성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다양한 입장이 나올 수 있다는 거였다.” 


- 쉽게 풀자. 그렇다면 노을이 안의 여성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전에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말을 정의해야 할 것 같다. 쉽진 않은데, 일단 몇 가지 자료를 거론해보면 이렇다. 토마스 퀴네의 저서 <남성의 역사>에 의하면 18세기 후반 현대가 시작된 이래 남성성은 의지력, 대담성, 폭력성, 독립성, 목표지향성, 비타협성, 지성 등으로 표현되고, 여성성은 허약함, 겸손함, 종속성, 관용성, 순종성, 의지박약함 등으로 특징돼 왔다고 한다. 토마스 퀴네는 이런 구분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분류는 다분히 남성 우월주의의 한 산물인 듯싶다. 성을 구별하는 근본 디엔에이에 포함돼 있기보다는 자라 온 환경이 부단히 만들어낸 것들로 보인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여성성은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포용적인 것’이라고 말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님의 얘기로 도움을 받고 싶다.” 

- 내가 조급한 거냐. 아무튼 성 정체성 얘기를 하기로 했으니까 우선 도입이라도 하고 보자. 뭘 그리 멍석 까는 일이 많은가. 아예 멍석깔 일이 있으면 이 참에 다 깔아봐라.

“나라고 빨리 말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있는데 말이다.”


- 그럼 노을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막 얘기해봐라. 셀프인터뷰라는 제목 대신 마구잡이 인터뷰로 바꿔 줄 테니까.

“마구잡이? 그것도 좋다. 로봇도 아닌데 깔끔하게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니는 것은 아닐 테니까. 좋다. 그럼 그렇게 해 볼까. 음. 살면서 화두처럼 삶에 던져지는 단어들이 있는데, 여성성이란 말은 감성이란 말보다 더 늦게 다가왔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의미가 있긴 한데. 아무튼 감성이란 면을 먼저 말해보자. 초기에 내가 감성에 주목했던 이유는 어쭙잖지만 대학시절 학생회를 하면서 느꼈던 것 같다.

대학생 초반 내 스스로가 운동하는 선배들의 얘기에 쉽게 빠져들 수 없었다. 나는 자꾸 망설이고 부정하곤 했다. 그걸 곰곰이 돌아보면 우선은 주장의 사실성 여부를 의심했다. 이철규씨 사망 사건을 두고 당시 내 생각은 어떻게 국가가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였다. 그때는 광주항쟁도 몰랐을 때니까 내겐 무척 당연한 의문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선배들의 주장은 분명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것일 텐데, 상대방의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진정한 설득은 논리적 설득이 아닌 가슴으로의 설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차츰차츰 싹을 틔워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은 누구를 설득한다는 의미보다는 소통의 의미가 더 강하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굳이 말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일정 정도 감성이 담당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더 나아가 요즘엔 감성을 느끼며 사는 삶이 이 생에서의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는 나름의 확신도 갖게 됐다. 단지 사람과의 소통문제뿐 아니라 내 삶을 성찰하는 몫으로도 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 얘기가 조금 엇나가는 것 같다. 아줌마들에게 강의할 때 취재원이 질문 방향과 다른 길로 들어서면 적절하게 끊는 것도 기자의 능력이라고 얘기했는데, 지금 이렇게 말려들고 있으면 어불성설이다. 여성성으로 돌아오든가 아무튼 원고지 1매 안에서 제자리로 돌아와 달라.  

“아무튼 감성 쪽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것이 여성성이라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감성적인 측면이 있으니까. 또한 내가 생각했고 관심 가졌던 것들이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에게 맞는 소통방식이었던 것 같고. 아 생각났다. 이렇게 풀면 어떨까?”

- 아무튼 노을이 마음대로 해 봐라. 이미 너의 횡설수설에 뒷짐 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동안 살면서 느낀 점은 보통 남자들과는 달리 나는 자꾸 작고 세세한 것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 때는 우유부단하기도 했다. 또한 어떤 일을 진행할 때도 앞에서 진두지휘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세세한 것을 살피는 역할을 즐겼다. 나는 내 안에 섬세한 면이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후천적인, 의식적인 면이 강하다.

그런 면들이 통상 말하는 남자다운 면보다는 여자다운 면이 아닌가 생각했다. 최근에서야 그것이 여성성이라고 알게 되었고,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 안에 여성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좀 더 시각을 넓혀 보니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이성성은 갖고 있었다. 융 심리학에서는 남성안의 여성을 아니마, 여성안의 남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내 안의 아니마로 주변 사람을 살펴보니 내 주변의 남성들에서도 아니마가 보이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 주변의 남자들? 이제야 진실을 밝히는군.

“내가 아는 몇 몇 남성들은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이 강하다. 아울러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남성성이 가진 부정적인 요소를 들 만하다. 대개의 남성들은 힘의 우위와 폭력을 선호한다. 스스로 힘이 없더라도 폭력을 동경하곤 한다. 남성들이 군대를 자주 추억하는 것도 시간만 지나면 진급하고, 그 진급에 따른 보장된 권력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집지사의 편집장을 만났다. 그분은 내 글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우연히 어떤 사람 얘기하다가 내 글 얘기가 나왔다. 그 분 왈 “노정환씨 글은 여자가 쓴 건지 남자가 쓴 건지 모를 때가 있지만, 그분은 감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 아닌가! 내 글이 최근에 감성을 강조하다보니 그런 경향이 있겠다 싶었으나, 그처럼 깊을 줄은 몰랐다.”  

- 노을이의 여성성은 성장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1남 4녀로 누나가 셋인 집안에서 자랐으니까. 여성들이 많은 집안에서는 남자들이 여성적으로 변하는 게 있긴 있더라. 한편으로는 유전적인 면도 있다. 나는 아버지의 성격과 어머니의 성격을 골고루 받았는데, 남성적인 면은 어머니에게, 여성적인 면은 아버지에게서 많이 받았다. 그런 영향도 있지만 그것을 전부라고 보는 건 무리다.” 


- 노을이 안에 여성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는가?

“전혀 없다. 오히려 내 안에 여성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성성은 많은 장점이 있다. 당장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도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깊다. 소통을 실현하려면 여성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내가 하려는 관계 코디네이터의 -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를 맺어주는 - 영역에서는 더욱 절실하다. 섬세하지 않으면 관계를 엮을 수 없다. 이런 현실적인 필요성 말고도, 여성성이 풍부한 남성이 좀더 세상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가며 사는 게 얼마나 좋은가.” 

- 노을이 얘기를 듣다보면 남성성은 사회악처럼 들린다. 그대, 과도하게 페미니스트들에게 투항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진 않다. 다만 지금 우리 사회 주류의 남성성은 많은 편견에 갇혀 있다. 이를테면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에는 남성성을 왜곡한 이데올로기가 투영돼 있다. 남성성에 대한 긍정적 성찰은 <남성 심리학자가 남자에게 말하는 남자의 생>이란 책을 통해 볼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남성성이 강한 남자보다는 여성성이 강한 남자가 좀더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더 적합하다. 그러니 아니마가 콤플렉스일 수 없다. 더 나아가, 여성성은 내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영역인 인권 평화 생태를 좀더 다양하게 가꿔줄 내재적 힘으로 어울린다. 지난번에 대전대 권혁범 교수가 불교환경교육원에서 강연할 때 지적한, ‘환경문제에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반응한다’는 얘기도 그런 면에서 곱씹을 만하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투항하려는 게 아니라 남성들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남들에게 이해를 구할 만큼의 이론은 없다. 그래서 오늘은 이쯤에서 말을 아끼는 게 좋을 듯하다.”


- 좀 다른 각도로 질문하자면, 노을이는 스스로 경쟁을 회피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이 사회는 경쟁으로 이뤄진 사회인데. 노을이는 이른바 무능한 남자 아닌가? 

“그것 역시 이데올로기다. 김지룡씨가 줌마네 아줌마들과 인터뷰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남자들은 지나친 경쟁심이 휩싸여 있다고.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성이 주는 피해는 여성들에게도 미치지만, 남성들 역시 스스로가 족쇄를 채우는 결과로 나타난다.”

- 그럼 노을이는 여성성을 가진 여성을 더 좋아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굳이 유형을 보자면 남성성이 강한 여성을 더 편하게 만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이번 셀프인터뷰는 좀 맥이 풀린다. 깔끔하지 않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번 주제는 포지션이다. 사회적(정치적) 정체성을 보는 다른 시각이다. 가만히 듣다보면 그것이 내 안의 여성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다.”


- 포지션이라면, 우선 당장 직장에서의 자리가 생각나는데.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 포지션을 생각할 때마다 축구선수 홍명보를 떠올린다.”

- 홍명보가 어떻길래 노을이의 포지션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홍명보는 축구팀에서 최종수비수다. 홍명보가 뚫리면 곧바로 상대방 선수들이 골키퍼와 대결하는 위급한 상황이 된다. 홍명보는 최종수비수지만, 상황을 봐서는 과감히 공격수로도 나선다. 자신이 나가야 할 때라도 판단되면 볼을 몰고 중앙선을 넘기도 하고 때로는 슛도 날린다. 그게 바로 홍명보의 매력이다.”


- 그런 홍명보의 모습이 다른 축구선수들 하고 무엇이 다른가.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논할 때 홍명보는 좋은 모델이다. 일단 축구 얘기를 좀더 하자면, 축구에서는 골을 넣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수비를 잘 해도, 슈팅을 아무리 많이 날려도 골이 들어가지 않으면 진다. 그러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은 골 넣은 사람에게 쏠린다. 연론 역시 골잡이를 집중 조명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홍명보는 아웃사이더다. 그는 골을 넣는 게 주가 아니라 골을 넣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상대방이 골을 넣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맡는다. 홍명보는 어떤 자리가 좀더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 알지만, 최종수비수 자리를 지킬 줄 안다. 축구의 포지션이야 감독이 정해 준다지만, 홍명보는 그 일을 착실히 잘 맡는다.”  


- 그 정도면 홍명보의 포지션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노을이가 조직과 개인의 관계로 해석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조직은 개인들로 구성된다. 조직을 구성할 때는 축구처럼 그 선수들의 개성에 맞게 자리를 배치해야 한다. 아울러 조직 내 개인은 홍명보처럼 능동성을 발휘해야 한다. 현재 상황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읽을 줄 아는 것 또한 능력이다. 아울러 조직 구성원, 특히 공동체를 지향하는 조직에서는 최선방 공격수보다는 홍명보처럼 전체를 읽을 줄 아는 자리에 있는 최종수비수가 더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 그 정도면 멍석은 충분히 깔아놓은 듯 하다. 이제는 노을이의 포지션을 말해 달라.

“나도 축구할 때는 홍명보같은 자리를 원한다. 내 성격상 공격보다는 수비가 더 잘 어울린다. 그동안 조직 생활을 봐도 내 삶은 홍명보식이었다. 내 자리는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었다. 늘 뒤쪽에 빠지길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켜보다가 내가 나가야 할 때라도 판단되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렇게 살아왔다.”  

- 추상적이다. 그동안의 일로 설명해 달라.

“우선 지난 8월에 있었던 김경환 선배 석방 운동이 그랬다. 당시 나는 뒤쪽으로 쳐져 있었다. 석방위원회 간사를 제안했을 때도 일반 참가자로 남았다. 공격수보다는 수비수를 원했다. 뒤쪽에 남아 전제 흐름을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그럼에도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석방위원회의 역할이 대강 정해지고 난 후 나는 그 빈틈을 찾았다. 석방운동의 홍보였다. 그게 오마이뉴스를 통한 기사릴레이였다. 그것은 최종수비수로 남고자 했던 내가 공격에 가담해 슛을 한번 날린 것과 같다.”


- 다른 모임에서도 그런가. 이를테면 백두산을 가기 위한 졸업생 모임인 백두산이나….

“거기도 마찬가지다. 모임을 만들 때도 처음엔 관망했다. 누군가 그런 모임을 제안한다면, 참여하려 했지만 제안자가 없었다. 그 상황이 내겐 공격수로 나가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임을 만들었다.”

- 그러나 모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홍명보는 공격수들의 활동이 왕성할 때는 최종수비수 자리로 돌아온다. 그가 만약 한번 공격에 나가 계속 공격수로 뛴다면 그는 올바른 포지션을 잡지 못한 선수다. 나는 백두산에 늘 관심이 있었다. 다만 초창기엔 나서지 않더라도 이끌어갈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 굳이 앞에 나설 이유가 없다. 더욱이 모임을 제안한 사람이 줄곧 공격수로 남아있으면 그 사람 색깔만으로 모임이 규정되기 때문에 좋지 않다. 잠시 딴 길이지만 그래서 조직(모임)은 제안한 사람과 이끄는 사람이 달라야 권한의 시비도 없고 다양성도 좀더 넓게 보장된다.” 


- 그러나 백두산에서의 노을이의 그런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방관자처럼 비친 점이 없지 않다.  

“그만큼이 내 문제다. 아울러 내 역할을 제대로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팀원들간에 서로 그런 역할에 대한 합의가 필요했는데 그렇지 않고 내 스타일만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느 그런 서운함을 없애자고 이런 셀프인터뷰도 하는 거다.”   

- 회사 일에서도 그런 포지션이 유지되고 있는가?

“그런 스타일로 일하는데 우리 팀원들이 이해하는지는 모르겠다. <작은이야기>에서 할 수 있는 내 역할을 생각하고 그 포지션을 찾으려 한다. 이를테면 취재쪽을 보강하기, 독자글을 좀더 기획해 청탁하기 등이 내 몫이다. 아울러 전체적인 잡지틀을 생각한다. 아무래도 매체를 몇 군데 더 접했으니까 그 경험이 바탕이 돼 하는 얘기다. 그러나 다른 팀원들이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 잡지를 만들자면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골고루 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노을이의 입장은 독선적으로도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코디네이터인데, 코디네이터 시대에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각각의 포지션만 잘 배치한다면 모든 역할을 다해야 하는 올라운드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즉 모든 영역에 관여하지 않아도 좋은 잡지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팀원들간의 믿음이다. 저 사람이 저 분야에서는 프로라고 믿어줄 수 있는. 그 전체를 조율하는 게 코디네이터 아닌가.” 


- 홍명보식 치고 빠지기는 오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공격에 나가야겠다, 수비에 치중해야겠다는 판단을 스스로 하는 것 아닌가. 

“맞다. 오만이다. 내 포지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게 뭔데 건방지게 혼사 생각해 치고 빠기고를 하냐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내가 모르는 일이다 싶으면 최종수비수만 본다. 얌전히. 그러면서 전체 판을 읽으려 한다. 그것이 이 포지션이 갖는 장점이다. 우리 팀원들이 마지노선까지 밀리면 나는 마지막 버팀목 역할을 한다.” 

- 개인간 관계도 그런 포지션이 적용되는가.

“이전에 김경환 선배 형수가 나더러 미끄덩거린다고 한 대목이 이런 나의 포지션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잘 되고 있으면 시큰둥해졌다가 너무 소원해 졌다 싶으면 열심히 연락한다. 뭐 이건 계산된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보니 그렇게 만나는 것 같다.”  


- 그런 홍명보식 포지션이 성격에 맞다고 보는가. 

“그것을 즐긴다. 최종 수비수로 빠져서 우리 팀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이것은 감시와는 다르다. 관망일 수도 있고, 내가 진정 필요한 자리를 찾는 탐색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내가 치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슬쩍 빠진다. 그러면서 뒷심으로 남는다. 내가 가끔 막판에 오기를 부리는 것도 그런 포지션과 무관하지 않다.”

- 그런 흐름들을 어떻게 조율하는가. 이를테면 어느 조직이나 일은 단 한번으로 되는 건 아닌데. 음 질문이 조금 어렵다. 셀프인터뷰에서는 네가 곧 나니까 이해하고 노을이 안에 있는 얘기를 좀 더 풀어 달라.

“홍명보식 움직임은, 음 뭐로 설명하면 좋을까. 직선으로 이어진 원둘레라고 해야 하나? 이를테면 지난번 회사에서 간 체육대회를 통해 설명해보자. 채육대회가 처음 거론되었을 때 처음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당시엔 회사사무실에 공고만 달랑 붙었다. 그리고 한 이틀 별 말이 없었다. 체육대회 일정이 정해지고 어찌어찌해 나와 다른 직원 한 명이 전체 진행을 맡게 됐다. 그때가 공격수로 나갈 때라고 생각했다. 체육대회에는 진행자 말고는 준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행사진행을 염두하고 체육대회 종목 등을 다시 선정했다. 공동 진행자인 다른 직원에게 저녁 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보다는 저녁 프로그램을 잘 진행할 것 같았다. 나는 오후 프로그램인 체육대회만 맡았다. 

여기까지 역할을 보면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가 다른 진행자와 역할을 나누면서 수비수로 돌아온 셈이다. 그 후엔 공격수와 수비수로 수시로 바꾸었다. 체육대회 종목을 네 가지로 나누고 각 종목의 진행자와 심판을 다른 직원들에게 각각 부탁했다.

체육대회를 통해 본 내 포지션은 회사 안에서 수비수로 있다가 모처럼 공격수로 나간 상황이었지만, 그 공격수로 나간 상황 안에서도 끊임없이 진폭을 달리하며 공격수와 수비수를 번갈아가며 바꾸곤 했다.”


- 이번에 학교 지기들과 벌이는 00학번 새내기를 위한 ‘1208 춤판’도 그런 포지션이 적용되는가? 

“당연하다. 실제 그렇게 치고 빠지기를 병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도 난 늘 최종 수비수로 남았다. 그래서 앞에 나선 공격수들이 지치면 내가 공격수로 뛴다.”

- 그런 포지션이 어떻게 노을이의 스타일로 형성되었나.

“글세, 그 형성 배경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내성적인 면과 그 안에 외향성의 진폭이 조화를 이뤄 그렇게 표출되는 게 아닌가 싶다.”

- 독특한 자리인 것 같다. 그러나 노을이 같은 사람은 어쩌면 조직 생활에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대부분 조직이 개인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집단의 한 부속쯤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풍토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더욱 ‘개인’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자리가 결국 지금의 내 정치성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게 한 것 같다.”


- 정치성?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 아닌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제는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싸움을 해야 한다. 내 싸움터에서는 아군 적군이 따로 없다. 나는 궁극적으로 ‘개인’을 존중한다. 이쯤 되면 아나키스트로 연결될지 모르겠는데, 아나키스트를 ‘반권위’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틀린 이해는 아니다.” 

- 얘기가 깊어진다. 주제가 바뀐 듯싶다. 포지션에서 정치적 정체성으로.

“요즘 나의 정치적 관심은 개인의 삶과 의식을 방해하는 정치, 사회적 집단, 다수의 의식 등과의 싸움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면 개인의 삶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싸움판이 무척 넓어졌다. 권위주의와의 전방위적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 얘기가 길어지려 하지만 이쯤에서 정리하자. 마무리를 해 달라.

“요즘 말수를 줄이려 한다. 사람들을 만나면 가능한 그냥 들어주려 한다. 내 생각과 다른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다. 가능한 그렇게 살고 싶다. 삶의 속도도 조절하려 한다. 몸이 아픈 것도 그렇고, 세상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내 꿈을 가꿔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도 든다. 오늘 셀프인터뷰 또한 그런 과정에서 가진 성찰의 시간이었다.” (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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