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며칠 동안 몸이 부쩍 내게 말을 많이 걸었습니다. 몸이 내게 거는 말은 좀처럼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뒤통수가 마치 쥐가 나듯이 먹먹해지고, 때론 마비되는 듯합니다. 글을 쓰겠다고 한 시간 정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말짱하던 뒤통수가 다시 죄어옵니다. 며칠은 그냥 근근이 참다가 도가 더해 진다 싶으면, 하던 일 팽개치고 회사에서는 잠시 소파에라도 누웠습니다. 집에서는 30분 글 쓰고 30분 침대에 누워있기를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엔가는 2년 전 구안와사가 왔을 때처럼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의 느낌이 영 달랐습니다. 그날은 불안한 마음에 근처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맡았습니다. 두어 시간 그렇게 쉬었기 때문인지 조금 나아진 듯 했지만,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장 취재를 위해 보은에 들렀을 때만 해도 몸은 멀쩡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정산소를 30여분 앞두고 서서히 뒤통수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뇌에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 몸이 건넨 말을 나로부터 전해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쉬라고 합니다. 몸은 쉬고 싶다고 말하는데 내가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전화를 걸어 내 안부를 묻는 안동교도소의 경환 선배는 제주도로 내려가라 합니다. 따뜻한 곳에서 살라 합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서울로 잠시 올라온 신정 누나 역시 같은 말을 합니다. 지리산 자락 구례나 하동 어디께가 살기에 좋다고 합니다.
삶을 촘촘히, 다양하게 살다가 이제는 지리산 자락에 몸을 두고 한의를 공부하는 누이인지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들을 만합니다. 지금 그렇게 아픈 것은 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니 좋은 거라고. 그러니 가만히 들어보라고. 그리고 몸을 도와주리고. 도와주는 길은 휴식밖에 없다고.
휴식.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그 어떤 꿈도 이룰 수 없으니 휴식보다 긴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여전히 간사한지라 자꾸 저울질 합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고. 지금 내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라면 그냥 접고서 어디 바람 좋고 햇살 좋은 곳으로 내려가겠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일을 접는다는 게 내 몸에게도 내 마음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만큼이 욕심입니다. 줌마네 자유기고가반 강의를 하던 날도 머리는 여전히 죄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날은 강의를 네 시간이나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내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요. 강의 도중 머리가 죄어오면, 뒷머리를 쓰다듬듯이 다독거렸습니다.
한편으로는 내 몸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내 몸이 화를 내며 일으킬 반란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상을 하고나니 내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입원할 일이 없었던 내 몸이, 체격 때문이겠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하다고 말하는 내 몸이, 그래서 마음이 가는 만큼 바지런히 잘 따라준 내 몸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을 때였습니다. 웃옷을 벗고 누워 물리치료를 받고, 십여 개가 넘는 침을 어깨 곳곳에, 얼굴 곳곳에 꽂아둔 채 누워 지난 회사 엠티 때 보았던 개 한 마리를 생각했습니다. 덩치 큰 그 개는 우리가 파티할 때 다가와 어느 직원이 준 소주 몇 잔을 받아먹더니 취해서 곧장 누워버렸습니다.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그 개와 지금 이렇게 아무런 몸도 놀리지 못하고 누워있는 나는 무엇이 다른가. 그 개도 제 욕심에 취한 것이고, 나 역시 내 욕심에 취한 것 아닌가.
결국 <작은이야기> 마감 기간 동안 틈틈이 휴식을 줍니다. 이전 같으면 오기로 밀어붙였을 텐데, 이제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준비합니다. 더 이상 방치하면 어찌 될 것 같은 불안이 조금이나마 몸의 말을 받아 들으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다른 생각 못하게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못 보았던 지기들이 한번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제주도와 강원도를 오가며 홍세화님 가이드로 나선 용포형도,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었던 미경 누나도 만났습니다. 퇴근하고서도 세풀은 일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때로 쓰고 싶은 말이 넘칠 때는 간단한 메모로 만족했습니다.
생각을 나누자. 생각을 쪼개자 합니다. 마감 때는 마감 한 가지만 하고, 끝나고 나면 세풀 쓰는 일만 하자 했습니다. 대신 남은 시간엔 덜 신경 쓰이는 책을 읽었습니다.
11월엔 몸을 보하는 약도 먹기로 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감기 등 특정한 증상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면 눈도 돌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몸에게 고개를 좀 숙이기로 했습니다. 마침 몸이 내게 말을 걸 때, 그 행위를 설명해주러 다가온 인연처럼 신정 누나와 만났기에, 일단 누이의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침은 인연이라는 말까지. 믿음이 있으면 약도 효험을 본다는 말까지. 지금까지의 인연으로 그만큼 믿기로 합니다. 마음 같아선 11월에 휴가를 쓰고 싶지만, <작은이야기> 일정상 12월로 미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대신 몸에게 약속합니다. 12월 휴가 때는 정말 좋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고.
지금도 몸이 내게 말을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합니다. 미욱하게도. (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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