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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이별도 할 줄 모르는 바보


 

연애하고 있다

사랑은… 멈추어 버렸다

그런데도

연애중이다


더위에도 땀 흘리지 않는 것들은 많다


‘연애만큼 열정적인 것은 없다’

이 말에 어떤 지인은 “에너지를 주니까요”라며 공감했다. 이유는 “든든하고 포근하고, 그래서 행복하고.” 허나 연애에 그것만 있으랴. 그 지인은 반대되는 대가도 말한다.

“…그러나, 그런 연애를 끝내고 난 아픔은 에너지를 받은 만큼이나 또 빼앗아 가더군요. 어릴 땐 그런 경험도 다 커가는 성장통이기도 하련만 지금 중년에 겪으니 막 늙더라구요. 몸이 늙는 건 그렇다손치더라도 마음이 늙을까봐, 그래서 겁나요.…”

<봄날은 간다>에 사는 상우가 이 얘기를 좀더 일찍 들었더라면, 그처럼 사랑의 뒤뜰에서 훌쩍거리는 일은 없었을까? 불꽃의 화려함에 반해 손을 내밀었다가 데인 아이처럼 가엾은 상우를 비디오로 다시 만났다.

상우에게 위로하는 편지를 쓰려다가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막막해 막혀버렸다. 이번에는 은수에게 그럼에도 당신을 이해한다는 편지를 쓰다가 역시 포기하고 말았다. 언어들은 저희들끼리 얘기할 뿐 도무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되돌아갈 수도 없이 막다른 골목 앞에 선 채 번번이 쓰던 글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두어 주….

쓸쓸한 기운이 도는 오늘에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2주 동안 쓰려했던 편지는 수신인이 잘못된 편지였다. 그 편지는 상우나 은수가 받을 편지가 아니었다. 내게로 보냈어야 했다. <봄날은 간다>에서 채였던 상우는 바로 나였고, 나 또한 또 다른 <봄날은 간다>의 주인공이었다. 


상우야!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당하고 난 후, 방황하고 미워하다 끝내는 주위만 서성거릴 수밖에 없던 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게 어디 너 혼자만의 모습이겠니. 불쑥 찾아온 이별을 만났던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을 거다. 마음 안에 남은 은수의 체취를 털어 낼 틈도 없이 이별은 밀려왔을 테니, 은수 자동차에 금을 긋는 일이 곧 네 가슴을 후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도 네가 당시 보냈던 방황을 가슴속에 소중히 묻어두길 바란다. 너에겐 아직도 많은 것들이 있단다. 네가 중심을 잃고 갸우뚱할 때 지구도 그만큼 흔들렸고, 은수가 떠난 빈 자리의 허전함만큼 하늘도 잠시 패였다. 세상은 너에게 이롭게 움직일 것이고, 은수의 이별 역시 너에겐 소중한 이생의 한 때였음을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4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작은 화분을 들고 다시 나타난 은수. 은수는 여전히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말을 걸듯이 웃음이 가득하다. 상우는 말을 아끼며 담담히 듣는다. 그리고 돌아 나와 함께 걷던 길. “한 달만 헤어져 있자”던,  “우리 헤어져”하던 은수는 말한다.

“우리 함께 지낼래?"

서성이듯, 망설이듯, 멈칫거리던 상우는 은수에게 받은 화분을 돌려준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하던 상우가 이제 먼저 이별을 고할 줄 안다. “너, 나 사랑하니?”하던 상우가 그 답을 알았다는 듯이 먼저 떠난다. 영화 속 상우는 따뜻한 이별까지는 아니어도, 깔끔한 이별 정도는 알게 되었다.

현실의 상우는 달랐다. 지난 가을 인연을 떠나보낸 후 잠시 현실의 상우 영혼엔 평온이 깃들였다. 이별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기특해 부단히 스스로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별은 오래가지 못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인연을 만났다. 헤어짐이란 잠시 지나는 구름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실의 상우는 따뜻한 이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깔끔한 이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은수에게 상우는 '또 하나의 남자'였다. 상우는 절대 은수의 전부일 수 없었다. 대숲소리를, 풍경소리를 채록하면서 만났던 사람이 상우가 아닌 ‘어떤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은수는 “라면 먹고 갈래요?”하는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상우에게 없는 또 다른 무엇이 그 ‘어떤 남자’에게 있었다면 은수의 사랑으로서는 충분히 가치 있는 만남이다. 그렇다고 은수를 미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은수에겐 사랑은 변할 수 있는 감정이니까. 은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줄 아는 여자다. 상대의 아픔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을 했더라면 싶지만, 그것은 ‘과욕’으로 불러도 좋다. 

상우는 그것을 몰랐다. 자신만이 은수의 마음 안에 영원히 남을 줄 알았다. 사랑은 영원하다고. 진정한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고. 누구나 그런 말을 하니까. 영원해야만 하는 사랑이 깨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제 깨닫는다. 현실의 상우가 지금 만나는 인연은 또 다른 은수일 것이라고. 몇 년 전 인사동에서 술 한잔 나누던 만남이 절실한 만남은 아니었으니까. 그날 현실의 은수 앞에 있던 남자 역시 또 한 명의 ‘상우’였을 뿐이었다.


6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만나는 남자에게 믿음은 있으되 사랑을 못 느낀다. 처음 만날 때도 사랑은 아니었다. 그러니 사랑은 좀처럼 피어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이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여자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그 믿음 안에서 사랑이 피어난다면 좀더 오래 이 남자와 연애를 하리라.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만나는 여자에게 사랑은 있으되 믿음을 느끼지 못한다. 애초 사랑의 마음으로 만났으나,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마음은 사그라들었다. 사랑은, 더 이상 내딛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정지해 버렸다. 이제 남자는 예감한다. 정지한 사랑을 움직일 믿음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이번 사랑도 떠나보내야 하리라.

이 여자와 이 남자는 서로 연애하고 있다. 여자는 스스로를 관찰한다. 믿음 안에서 사랑이 피어날 수 있을지.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다만 여자를 관찰한다. 여자의 마음 안에서 믿음의 싹을 틔워줄 수 있는지. 남자로서는 답답할 노릇이다. 사랑이란 본디 내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내가 하기 나름이지만, 믿음이란 본디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남이 베풀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자와 이 남자는 지금쯤 깨닫고 있을 것이다. 지금 둘의 만남은 결과가 아니라 다른 사랑을 찾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지금의 인연은 서로의 사랑을 찾아주는 더듬이 정도의 의미 이상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에게 고백하지 않았을 뿐, 충분히 예감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해야 한다. 누구에게라도 더 나은 사람이 다가온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보내줄 수 있는 마음을. 상대방이 먼저 불쑥 떠날 날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면 머무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고, 보낼 마음이 있으면 남은 마음에도 미련이 없어진다. 


7

“서산에 지는 해가 지고 싶어서 지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가고 싶어서 가나.” (<봄날은 간다> 중 아리랑 채록 가사의 부분)


8

불행하게도 은수의 사랑이 상우에겐 맞지 않았다. 각각의 빛깔에 맞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데, 연애란 ‘과정’일 뿐인데, 상우는 마치 그런 과정이 ‘단 하나뿐인 결론’인 줄 알았던 것뿐이다. 다른 사랑이 쌓이고 쌓여 새 인연을 만나기 위한 길을 내고, 이별이 쌓이고 쌓여 새 인연을 찾기 위한 빛이 되는 것인데.

다만, 남자에게 채인 여자가 익숙한 사람들에겐 여자에게 채인 상우의 아픔은 얼마나 낯선 모습이었을까. 상우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힘든 삶의 수수께끼였다. 이별을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 이별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려주던 할머니가 없었다면 상우는 좀처럼 이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남자다. 


9

이별로 인해 마음이 늙을까봐 겁난다 했던 지인은 말한다.

“그래도... 연애는 꼭 필요해요 우리 삶에 있어서.”

함부로 사랑을 포기하지 말 것이며, 겁 없이 인연을 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다.


10 

바람입니다. 바람이 바람을 만나 소리가 자랍니다. 소리입니다. 소리가 소리를 만나 인연이 맺어집니다. 인연입니다. 인연이 인연을 만나 사랑이 돋아납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만나 바람이 피어납니다. 바람입니다. … 소리입니다 … 인연입니다 … 사랑입니다 … 바람이고 소리이고 인연이고 사랑입니다


마디는 있어도 끝은 없습니다. 마디를 넘는 나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끝입니다.

내가 시작입니다. (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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