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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2+33

아파트 재계약의 조건


 

84년 남원에서 서울이란 낯선 도시로 우리 가족이 이사 왔을 때, 첫 터전이 상계동이었다. 당시 지금의 상계역 근처엔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우리 식구가 살 집은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250만원이었다. 그 후 지하철 4호선이 들어선 상계동은 ‘상계동올림픽'이라는 철거민의 역사를 뒤로 한 채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터전에 살던 원주민들은 철거에 밀려 쫓겨났지만, 우리 식구는 아파트들이 형세를 넓힐 때마다 밀리고 밀리면서도 단독주택을 찾아 이사했다. 매년 전세값은 올랐지만, 용케도 부모님은 빚지는 일없이 개발의 파편들을 묵묵히 피해갔다. 


그런 우리 식구들에게도 그 개발의 혜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마침내 아파트 건설 바람은 우리가 살던 전세집에도 불어왔다. 곧장 쫓겨날 처지였지만 그래도 얻는 게 있었으니, 세입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이었다. 입주권 역시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 그곳에서 마지막 전세를 살 때는 이미 개발을 한다는 소식을 듣던 때라 입주권으로 얻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살아야 했다.

상계동 불암산 자락에 아파트가 완공되던 때 - 일곱 동의 아파트 중에 한 동이 영구임대아파트다 - 부모님의 뜻대로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이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로서는 그토록 꿈꾸었을 아파트에는 입주하지 못했다. 2년 전 당시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한 상태였으니 아버지만 들어가게 됐다. 


영구임대아파트는 입주자의 형편에 따라 계약금의 액수가 네 가지 정도 되는데, 월 13만 8천원의 월세를 내거나 월세를 내지 않는 전세계약도 가능했다. 아버지가 입주할 당시엔 가장 적은 계약금을 내고 월세로 계약했다. 당시 살고 계시던 집의 전세금이 나오지 않아 그나마 있는 돈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평일 저녁 아버지 집에 들른 것은 임대아파트 재계약 건 때문이었다. 계약이야 아버지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계약금이었다. 2년 전의 계약금액 그대로 한다면 연장 계약만 하면 되지만, 지난해 몸이 아픈 이후 직장이 없는 아버지에게 매월 꼬박꼬박 내야하는 13만 8천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 계약할 때는 전세로 돌려보자 싶었다. 월세금을 조금이라도 적게 내기 위해 계약금을 조금 더 마련해 보자고 했던 터였다. 추가 계약금은 아버지가 은행에 얼마간 저축해 놓은 돈으로 맞추기로 했다. 그런데 예금으로 가입해 놓은 돈의 만기가 올 3월이었다. 월세를 5만원 정도만 낼 수 있도록 재계약을 하자면, 그 예금을 해약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두어 달만 기다리면 계약기간이 끝나는 터에 예금을 해약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모자란 돈은 내가 빌려드리고 두 달 후 예금을 해약한 후에 돈을 되돌려 받기로 했다.


두어 해 전에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가진 돈은 얼마며, 혹 어디에 빚진 것은 없는지 등등. 통장이야 아버지가 보관하지만, 내가 전체를 파악하고는 있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재산 규모로만 보자면 큰 신경을 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재산이 적다는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어디 취직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다. 그냥 노는 게 갑갑해 일자리를 구해볼 심산이라고 했다. 그러나 취업은 쉽지 않았다. 환갑이 넘은 나이도 걸릴 뿐더러 한번 호되게 병원신세를 지고 난 뒤라 몸이 허약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돈을 벌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제 정말 아버지를 ‘책임’질 때가 왔다. 원칙은 간단했다. 가능한 아버지가 가진 돈으로 아버지의 삶을 꾸려가시게 한다. 그게 어려워지면 내 몫을 한다.

미리 돈을 조금씩 드리는 방법은 제외했다. 지금 아버지가 돈을 여유 있게 가지면 그만큼 당신의 몸을 축내는 술값만 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돈을 다른 데 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그 길을 찾는 게 내가 가진 원칙이었다. 훗날 내가 생활비를 챙겨드리더라도 당신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길, 그러면서도 내가 드리는 돈으로 당신의 삶이 궁핍해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번에 집 계약을 할 때도 그런 원칙에서 판단했다. 돈을 모아보면 전세로 돌릴 수 있는 여윳돈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번 계약하면 2년 동안은 살아야 하니, 급하게 돈이 필요할 경우 대책이 없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여윳돈을 현금으로 은행에 두는 게 필요했다. 다만 아버지가 임의로 찾아 쓸 수 있는 돈은 일정 정도 남겨둬야 했다. 내가 드리는 용돈 말고도 당신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아 쓰게끔 하는 게 좋을 듯 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갔던 날, 그러나 그날은 재계약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이미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민원이 들어와, 재계약을 가로막았다.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주정이지만, 다른 주민들에겐 또한 나름대로 민원이 될 법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 편을 들었다. 다행히 아무리 핏줄이라도 옳지 못한 일에는 동조하지 않는다는 내 원칙까지 무너뜨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 다음 날 관리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30여분을 얘기했다.

내 생각에 아파트 재계약을 하는 일은 재산권에 대한 문제였고, 민원은 그보다 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러니 그 민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재계약을 가로막는 것은 옳지 못했다. 또한 아버지가 하시는 얘기 역시 일종의 민원이었다. 방법이 잘못되었지 아버지의 얘기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민원은 밤마다 어디선가 들리는 쿵쿵거리는 소음의 원인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위층에서 밤마다 뭔가를 하는 모양이었는데, 아무리 얘기해도 개선이 없자 화가 난 아버지는 술김에 주변에 큰소리를 친 모양이었다.


관리소장 역시 나름대로 명분은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타협하고, 그러나 소장이 억지를 부린다 싶으면 강하게 밀기도 했다. 다만, 관리소장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놓치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소장을 통해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을 고칠까도 했으나, 아버지는 이미 그 일로 마음이 깊게 상했다. 자칫 길게 끌면 아버지가 임대아파트를 재계약하지 않는다고 할까봐 일을 일찍 끝내고 싶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아버지는 재계약을 마무리했다. 계약 후, 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였다. 멋쩍게 웃으시면서 이러저러한 상황을 얘기하셨다.

“네가 뭐라고 했는지 소장이 그러더라. 아들이 참 야물더라고."


아버지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역시 나는 큰 아이를 하나 키우는 부모가 되었다 생각했다. 미워도 밉지 않는 것, 이렇게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내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 그래도 여전히 걱정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것. 내 어릴 적에 아버지는 나를 보며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내게 용돈을 주면서도 어쩌면 나처럼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서 금액을 정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마다 적게 준다고 미안해하지는 않으셨을까! 그 무렵 이메일을 통해 잠시 심란한 내 마음을 엿보였더니 한 읽새가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임금에게 세 번 간하여 듣지 않으면 임금 곁을 떠나고, 어버이에게 세 번 읍소하여 말을 듣지 않으면 울며 어버이를 따른다는 고사성어가 있거든요.” (2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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