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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랑 놀랑

그녀는 예뻤다 - 딸랑 한권?①

 

2009년 12월 12일 오후,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줌마네>. 네댓 평 남짓한 방에 아줌마들 10여명이 둘러앉았다. 약 석 달간 진행해 온 <동네한바퀴 더>의 출판 기념회 자리다. 나 역시 ‘선생’의 이름으로 방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마감고통에서 막 벗어난 아줌마들은 어느새 그럴싸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두었다. 


지역잡지 <동네한바퀴 더> 창간 작업은 09년 3월부터 6개월 정도 글쓰기 수업을 받은 아줌마 10여명이 함께 했다. 기획안을 작성하고, 취재하고, 기사 쓰는 과정은 기본이었다. 사진과 일러스트까지 아줌마 몇몇 분들이 직접 참여했다. 더욱이 광고․후원 섭외, 홍보, 유통․배포 등 한 권의 잡지가 태어나서 독자들의 손에 닿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아줌마들의 수작업으로 마무리되었다. 


1.

출판기념회는 서너 가지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자신이 쓴 기사를 소리내 읽는 시간도 있었다. 아줌마들은 잡지 앞장부터 자신이 쓴 기사가 나오면 또박또박 읽었다. 기사를 보고 읽는 게 아니라 듣고 느끼는 시간은 참 묘했다. 필자가 글을 읽으면, 필자의 부름을 받은 단어와 문장들은 바닥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2차원의 글들이 3차원으로 입체화 되는 순간이었다. 걸을 수 있게 된 그 글들은 인쇄 상태와는 다른 촉수로 감성을 자극했다. 


낯선 동네를 돌며 기획하고, 취재원 만나 질문하고, 질문 내용을 정리해 기사쓰고, 기사를 퇴자 맞고는 다시 수정하고, 때론 날밤 새며 쓴 기사를 싹둑 잘라내고, 어렵사리 넘긴 원고가 종이에 디자인돼 나오면 다시 빨간 펜으로 수정하고,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고….

그 모든 과정들이 기사 안에 녹아 있다가 필자의 목소리가 기사를 훑고 지나면 마치 한 편의 연극장면처럼 반추되었다. 이런 묘한 분위기에 한 아줌마는 눈물이 흘러 자신의 기사를 마저 읽지 못했다. 


제작 과정에 대한 저마다의 소감을 말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때론 간단히, 때론 농담끼를 섞어 한두 마디씩 이어갈 때, 아줌마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응시했다. <줌마네> 강의를 하면서 아줌마들의 얼굴을 그리 오래 쳐다보기는 처음인 듯싶었다. 두어 번 아줌마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나니 어느 바닥에 누워있었는지 문득 문장 하나가 3차원 공간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예뻤다”


2. 

글 쓰는 게 밥벌이가 아닌 이들이 글 쓰는 일은 어렵다. 다른 업을 가진 이들이 잡지를 만들겠다고 나선 일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 적어도 육아와 주부라는 두 개의 업을 가진 아줌마들이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겠다고 나선 일은 가히 모험이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지샜던 밤들도 적지 않았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직장의 눈치를 봐야했던 혹은 다른 활동과 일정을 조정해야했던 수고도 있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때론 남편과 아이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해야 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오가는 데만 네댓 시간을 들이기도 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취재원들과 공감을 이뤄내려 원고료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글을 평가받는 자존심 구겨지는 일까지 감내했다.  


‘잡지를 만들기 위해’이뤄진 그 모든 과정은 노을이의 수업 과정엔 없었다. 방과후수업이었고, 자율학습이었다. 참고서도 없었고, 다닐 만한 학원도 없었다. 수업 과정은 야박하게도 잡지에 필요한 글을 생산하는 데만 맞춰졌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을 잡지를 만든다는 이유 하나로 모른 척 했고, 무관심해 했다. 누가 들어도 타당한 이유로 서너 가지를 들이대도 결론은 하나였다.“다시 하세요.”  


그럼에도 아줌마들은 '잡지를 만들기 위해‘로 시작하는 많은 일들을 치러냈다. 그 모든 것을 지혜로, 경험으로, 슬기로, 오기로 넘어섰다. 때론 혼자서 터벅터벅 걸었고, 때론 서로에게 언니처럼, 친구처럼 다독이고 토닥이며 버텼다. 

출판기념회 자리에 앉아 있던 ‘선생’이란 이름의 코디네이터는 그런 걸음들을 들은 터 였다. 


3. 

‘예쁘다’

통속적 해석만 놓고 보자면 들어내 얘기하기엔 무안한 단어다. 이미 박진영이 노래 제목으로 사용한 터라 식상하기도 하다. 외모를 상찬하는 의미만이 담겼다면 오히려 <동네한바퀴 더>의 성과를 표현하기엔 부족했을 단어다. 그러나 진정과 열정이 가득 찬 사람을 만나면 굳이 헤아리지 않고도 샘솟는 단어다.


아줌마들이 <줌마네>와 함께 한 시간들은 잡지를 만든 시간이 아니었다. 서른 살인 아줌마는 지금까지 살아온 30년과는 다른, 마흔 살의 아줌마는 여기까지 살아온 40년과는 다른, 쉰 살인 아줌마는 오늘까지 살아온 50년과는 다른, 삶들을 잠시 살아본 시간이었다. 단지 그 시간을 채운 것이 글이었고 잡지였을 뿐이다.  


코디네이터 역시 기획하는 법, 취재원 찾는 법, 기사 쓰는 법을 들이대며 잡지를 만들었지만, 그것들은 잡지를 만들기 위한 일들만은 아니었다. 마흔 살의 삶에 또 다른 빛깔 하나를 채우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소통의 시간이었다.

아줌마들이 잡목 숲 같은 일상의 태클을 넘어 기사를 마감하고, 사진과 그림을 완성하며, 디자인을 차곡차곡 배치하며, 너무도 명백한 진전을 이룰 때, 톡 톡 터지는 감탄사들이 마흔 살에 스며들었다. 그 감탄사들이 쌓이고 쌓여 만든 한 개의 단어가 “예쁘다”였다.


4.

지금 당장, 10개월의 글쓰기 경험이, 30년의 삶에, 40년의 삶에, 50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미미했다. 0.01도만 틀어도 10년 후의 삶은 다른 지점에 있고, 한두 방울의 감물로도 투명한 물에 색을 입힐 수 있다. 

0.01도의 각과 한두 방울의 감물이 가진 변화의 가능성, 지금은 아줌마들이나 코디네이터에게나 모두 열려 있다. 지난 10개월은 그 문을 단 1센티라도 더 열고자 한 날들이었다. 


인연의 흐름에 익숙한 대로 살다가, 언젠가 다시 <줌마네> 아줌마들을 만나면 그때도 이 문장이 떠올랐으면 좋겠다.

“그녀는 예쁘다.”


<사진설명>
2009년 8월 <줌마네>에서 아줌마들과 함께 인문학캠프를 떠났다. 살림노동하는 아줌마들에겐 휴식이기도 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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