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사무실에 나와 일하고 있는데 눈이 내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함박눈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청 광장에 회색빛이 돌 정도였다.
문득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일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버티고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이 ‘놀․아․주․어․야․한․다’는 것이었다. 노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놀 수 있도록 내 자신이 배려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컴퓨터를 껐다. 마음이 하고 싶은 일을 이런 일요일에도 일 때문에 못한다면, 평상시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카메라를 꺼냈다.
가방을 멨다.
우산을 챙겨 들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이미 머릿속엔 여정이 정해졌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신촌 방향으로 간다.
지하도로 시청 광장을 건넜다. 덕수궁 입구 쪽 지상으로 올라왔다. 눈송이들이 휘날렸다. 덕수궁 돌담길에 놓인 가로수들은 덩치가 크지 않았다. 그 가지에 눈을 얹혀 있으니 굵기가 반쪽이었다.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모두 그 모양이니, 눈 내린 덕수궁 돌담길엔 눈반 나무반이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은 풍경일 뿐이었다. 한쪽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가방은 대각선으로 맨 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오가며 경비를 서는 전경들과, 눈싸움을 벌이는 가족들, 돌담에 등을 기댄 붕어빵집 등이 눈 내리
는 일요일 한 켠에서 또다른 풍경을 그려냈다.
쉬엄쉬엄 걷는 동안 눈은 그쳤다. 도로 길가에 내린 눈은 어느새 녹아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정동극장 근처를 지날 때 다시 함박눈이 내렸다. 그 무렵 예정했던 여정을 바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경희궁으로 갔다. 궁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경희궁 뜰에는 눈이 제법 쌓였다. 큰 나무 아래엔 꼬마들이 눈덩이를 굴렸다.
경희궁의 문턱을 넘나들며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눈밭도 정겹고, 등을 살짝 내 민 기와지붕도 좋았다. 궁 안을 바라보느라 허리를 빼고 선 담장 밖 나무들까지도 눈 내리는 겨울에 잘 어울렸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눈 내린 서울 도시 여행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경희궁 근처에 있는 서울도시박물관 입구에서는 경비원 서너 명이 어느새 내린 눈을 한 곳으로 쓸어 모았다. 오래전에 시작했는지 어느새 박물관 입구는 말끔하게 아스팔트 포장이 드러났다.
그때서야 경희궁에서 만난 눈은 지극히 예외적인 도시의 눈임을 새삼 깨달았다. 경희궁에 내린 눈은 시골 들산에 내린 눈들과 흡사 했다. 시골 들산에 내린 눈은 오래 오래 간다. 그래서 두고 보는 맛이 있다. 양지쪽이 먼저 녹아도 음지쪽 골짜기는 눈을 오래 간직했다. 그때는 온 산이 눈으로 덮였을 때와 또 다른 맛을 자아낸다.
반면, 서울 도시에서 만나는 눈은 내리는 순간뿐이다. 내리고 나면 곧장 치워져야 한다. 생활에 불편을 주는 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도시에 내린 눈은 가능한 빨리 사라져야 한다. 사람의 보행을 위해, 혹은 차들의 속도를 위해. 그러니 감상도 빨리빨리 해야 한다. 오직 내리는 그 순간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 세태에 아쉬움을 표현한들, 그 또한 얼마나 정서의 사치인가! 당장 나부터도 불편하다고 투덜거릴 텐데.
인공의 도시는 그처럼 자연에게도 속도를 요구한다.
태초 사람은 자연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일수록 인공에 가깝다. 인공은 자연보다 인공끼리 친숙하다. 또한 인공은 효율성을 우선으로 계산한다. 아울러 효율성은 속도가 빠를수록 높게 평가받는다.
나 역시 인공물로 산 지 오래됐다. 내 주변엔 자연보다 인공이 더 많다. 또한 속도에 충분히 중독 돼 있다. 그러니 속도가 중요한 도시에서 어찌 스스로 놀 수 있겠는가! 논다는 것은 속도에 대한 배반이요 배신인 셈인데…. 자연스레 스스로 놀 수 있는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일요일. 한 시간 남짓한 눈맞이 나들이는, 그래서 놀․아․준 것이었다.(200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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