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신용카드를 없애다

 

 

2005년 8월 12일, 신용카드를 없앴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은 행정처리 절차 끝에, 약 6년 정도 된 신용카드와의 인연은 끝났다.


산용카드를 없애겠다는 생각은 지난 해 연말에 가졌다.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은 굳이 소유하지 말자는 셈속이었다. 그동안 신용카드는 무척 단순하게 사용했다. 1만원 이상되는 금액을 거래할 경우 카드결재를 하는 용도였다. 거기에 1년여 전부터 교통카드 기능이 더해졌을 뿐이다. 더욱이 그처럼 단조로운 용도에서도 사용은 무척 제한적이었다.

신용카드의 미덕이라 할 대출은 아예 내 생활습관과 거리가 멀어 꿈도 꾸지 않았다. 카드결재를 하더라도 어떠한 경우라도 할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낼 돈인데 굳이 미뤄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한 카드결재의 99%를 일시불이었다. 교통카드기능 또한 지하철 정기권을 구입하면서 버스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관에서도 할인혜택이 되지 않아 두루두루 사용하고자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신용카드가 나름대로 몫을 했다면 그것은 연말정산시 소득공제 대상이 된다는 정도였다. 그런 비용으로 1년에 1만원의 연회비를 지급하고 있었다.


지난해 말, 2005년도 경제생활을 설계하면서 신용카드를 없애기로 다짐했다. 신용카드가 주는 또다른 미덕이 내게는 장애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덕이란 이달에 사용한 금액이 다음달에 청구된다는 점이었고, 장애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매월 경제결산을 하는 일이 수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매월 말이면 그달의 수입과 지출을 비교하는데, 다음달에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신용카드 지출비는 그 계산을 복잡하게 했다.
 
한 달 지출비에는 신용카드 지출금액이 포함되는데, 실제 통장 잔액에서는 빠져나가지 않아 이 괴리된 계산을 정리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또한 다음달에 결재한다는 게 마치 빚을 지고 사는 듯해 약간의 찜찜함도 없지 않았다. 그런 불편함과 찜찜함은 결국 신용카드를 없애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다.


그쯤에서 만난 것이 현금카드가 진화한 체크카드였다. 현금카드는 지출을 카드로 결재한다는 점에서는 신용카드와 같았다. 그런데 가맹점이 너무 적어 생활에서 사용하기엔 불편이 많았다. 체크카드는 그것을 보완했다.


체크카드는 신용카드가 거래되는 가맹점이라면 어디든지 거래할 수 있다. 또한 신용카드와 같은 비율로 연말 정산 때 소득공제의 대상도 된다. 여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대출 기능은 아예 없다. 체크카드의 단점이라면 결재한 금액이 거의 실시간으로 통장에서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그 단점이 내겐 장점이 됐다. 월말 결산을 할 때 실제 사용액과 총장 지출액의 차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대신에 체크카드를 사용하기로 결심하고는 은행에 들러 체크카드를 신청했다. 그럼에도 신용카드를 없애려면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무실에서 시간외 근무를 확인하는데, 또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교통카드 기능이 있는 카드가 필요했다.

따라서 신용카드를 없앤다면 교통카드를 별로도 구입해야 했다. 할 수 없이 1월부터 신용카드는 교통카드 기능만, 그것도 버스를 이용할 때만 사용했다. 신용카드로서는 부가서비스가 주 용도가 되었으니 무척 자존심 상할 일이었으나 오롯이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식물인간이 되다시피한 신용카드의 안락사를 도운 것은 체크카드였다. 어느 날 체크카드가 교통카드의 기능까지 포함하게 됐다. 그때까지도 신용카드는 버스 탈 때 교통카드의 기능만으로 사용돼 한 달 사용료가 3~4천원이었다. 그리고 몇 달은 게으름으로, 몇 달은 번거로움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 번거로움과 게으름이 8월 12일에 끝났다.


8월 12일, 총액이 7,077원인 일반 통장을 해지하려고 은행에 들렀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내는 심정으로 체크카드로 교통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


일반통장을 해지하고, 다른 일반 통장을 정리하는데 그동안 체크가드로 사용한 결재내역이 기록되는데 새 통장 두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걸 두고 은행원과 두어마디 얘길하다가 전자통장을 발급했다. 종이통장 대신에 카드로 정리되는 통장이었다. 다시 창구를 바꿔 체크카드에 교통기능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일처리를 하는 동안에 신용카드도 꺼냈다.

신용카드는 3분이 안돼 은행원의 가위질이 몸통이 대여섯 개로 조각났다. 잔인한 안락사였다. 체크카드는 교통기능이 추가되어 새로 발급됐다. 새 체크카드는 말끔했다. 디자인이 맘에 들었다. 신용카드 못지않게 고급스러움도 있었다. 그 깔끔함에 반해 산산조각난 신용카드에 대한 미련은 거의 잊어 버렸다.  


신용카드를 발급한 때는 1999년 무렵이었다. 당시 마포동에 있던 국민은행에 들렀을 때 창구 은행원의 권유에 가입했다. 본능처럼 신용카드를 선호하지 않은 지라 당시에도 망설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신용카드에 지배당하지 않을 자신감을 확인한 후 신용카드를 발급했다는 것이다.
가끔 사무실을 찾는 신용카드 가입 권유 영업사원들이 와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거절했다. 필요 없는 것이라면 애초에 소유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덕분에 신용카드의 유혹에 빠져 경제적 고통에 처하는 사람들의 대열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서른여섯 해 동안 단 한 장 갖고 있던 신용카드를 없앤 날, 단지 카드 한 장을 없앤 것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그 생각의 끝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 찬찬히 살핀다.

경제력에 따라, 그것도 거래에서만 통용되는 신용. 그런 신용이라면 굳이 갖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하지 않는 생활을 꾸려야 한다는 다짐이 보인다. 있는 만큼만 쓰고 사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경제력에서만 신용을 보장하는 지금의 신용카드와는 다른 또다른 의미의 진정한 신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20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