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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34와 12분의 1


 

해석 

한 여자가 “보고 싶다”며 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남자는 왜 보고 싶은 지 세 가지를 말하라고 했다.

전화를 건 여자가 웃으면서 ‘첫째도 모르고, 둘째도 모르고, 셋째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싶다는 거지?”

여자의 대답을 들은 남자는 여자의 답변을 그렇게 해석했다. 


이번엔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여자 역시 남자에게 왜 보고 싶은지 세 가지를 말하라고 했다.

전화를 건 남자 역시 웃으면서 ‘첫째도 모르고, 둘째도 모르고, 셋째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싶다는 거지?”


답변을 들은 여자는 웃으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었던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여자와 다른 해석을 내렸다.

“아니…,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보고 싶다는 거야!”(200301)


이만큼의 흔들림

어느 날 퇴근길, 무심히 책상 위에 놓인 한국타이어에서 발행하는 사외보인 ‘굴렁쇠’를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지하철을 탄 후 곧바로 굴렁쇠를 꺼냈다. 그곳엔 병준 형의 글이 빼곡했다. 고정꼭지인 ‘조병준이 요리하는 세계여행’뿐만 아니라 겨울호에 맞춰 다룬 울릉도 특집에서도 병준형 이름을 발견했다.


내 눈길은 특집 취재를 떠난 병준형에게 끌렸다. 그 동안 연락도 못하고 지냈는데, 그처럼 형은 즐겁게 살고 있었다. 예의 그 순하디 순한 표정으로 아무런 꾸밈없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도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울릉도에서 3박 4일간 취재를 했다는 그 자체가 부러웠다. 병준형이 찍은 사진에, 병준형이 쓴 글에… 여행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40대 중반을 살고 있는 청년의 자유로움이 묻어났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긴 울릉도는 충분한 유혹이었다. 


형의 삶이 부러워지면서, 반작용이 일듯 내 삶이 꿀꿀해졌다. 병아리만한 결과를 얻으려고 해도 공룡을 물리쳐야 하는 여정을 가는 듯한 직장 생활. 지하철에서 10여분 남짓 잡지 몇 장을 뒤적거렸는데, 마치 울릉도에 갔어야만 했었는데 못 가게 되어 항구에서 돌아서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버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유혹에 따른 모든 일에 체념했다. 다만, 내 일상을 잔잔히 흔든 병준형을 만난 것을 감사해야 겠다. 늘 이만큼씩은 흔들림이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전히 마음은 꿀꿀하지만. (2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