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온날

한때 왕이었던 손님은, 두리반의 주인을 외면했다

 


3년 전 동교동 삼거리 근처에 살 때였다. 간혹 밖에서 식사를 하게 될 때는 홍대 전철역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입맛이 워낙 시골스러워 딱히 입에 맞는 음식이 없음에도 늘 발걸음은 홍대 전철역 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린나이건물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철길을 건너 홍대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새로운 음식점을 발견했다. <두리반>.


가게는 크지 않았다. 길가로 난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실내는 산뜻했다. 안에 들어가도 밖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 짠 식탁에 윤이 흐르고 깔끔했다. 칼국수를 내오는 그릇도 정갈했다.


두리반은 창천동을 떠난 이후엔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곳을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홍대전철역 근처에서 식사약속이라도 있으면 몇 군데 후보식당 가운데 한 곳으로 넣곤 했다.


그 두리반이 최근에 다시 기억을 깨웠다. 두어 달 전부터인가 두리반은 홍대 앞 작은 용산으로 불렸다. 2009년 1월에 발생했던 용산 남일당 농성 철거민 사망사건과 흡사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두리반은 마포 지구 단위 계획 철거지역에 들어 철거를 해야 할 건물에 있다. 그러나 두리반의 주인은 2002년 식당을 낼 때 들어간 권리금 1억원은 보상받을 길이 없어 건물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설을 이틀 앞둔 날, 홍대전철역 근처에 갈 일이 있어 일부러 이곳에 들렀다. 멀리서 보니 “토지는 10배 매입했는데, 세입자는 알거지”라고 쓴 현수막이 보였다. 서쪽 벽면으로는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는 검은 현수막도 내걸렸다. 길을 건너 두리반 앞으로 갔다. 철거지역을 두른 철가림막에는 두리반을 다룬 <한겨레> 기사가 붙어 있다.  

앞쪽 철가림막엔 "pen은 삽보다 강하다"는 "인천작가 一同"의 글이 있다. 행인인 듯 지나간 두리반 앞은 페허처럼 어지럽다.


 

두리반은 칼국수가 주요 메뉴였다. 그런데 칼국수 앞에 다양한 이름이 붙었다. 닭칼국수, 뽕칼국수 등. 보쌈도 있었다. 깔끔한 식탁위에 놓인, 정갈한 그릇에 담긴, 맛깔스런 음식이 좋았다. 두리반 철거 현장엔 그 맛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두리반 입주 건물을 둘러싼 철가림막엔 낙서들이 많았다. 다시 한바퀴 돌다가 주인이 쓴 듯한 낙서를 발견했다.

“알려드립니다. 그동안 두리반을 이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12월 24일 강제철거를 당해 더는 영업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권리금은커녕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나는 이 참혹한 현실에 우리는 기어이 싸울 것입니다. 손님 여러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두리반 -”


크리스마스 이브에 날벼락 같은 '선물'을 받은 두리반. 이 손님에 나도 포함되었을까! 한때 왕이었던 한 손님은 주인의 고통을 외면한다. "떼쓰는 게 아니라 '절규'라고 해야 옳다"고 말하는 얘기까지도. 

오늘은, 깔끔한 식탁위에 놓인, 정갈한 그릇에 담긴, 맛깔스런 두리반 닭칼국수를 먹고 싶다. 작은 음식점의 넓은 창가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함께 보고 싶다. 그 어느해 그 어느 날의  오후처럼. (2009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