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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온날

미래인류의 존엄은 없는, 영화 <아바타> - 2% 관전평

 

<2% 관전평은 어느 작품의 일부분에 대한 시비걸기다. 어느 한 부분을 돋보기로 들이대 그것만 도드라져 보는 괴팍한 습성이다. 그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러거나 말거나’ 쓰련다.>


개봉한 지 한참 지나 영화 <아바타>를 봤다. 기어이 3D를 봐야 한다는 고집 때문에 늦었다. <아바타>. ‘모든 걸 다 차치하고’ 그 영상기술이 놀랍다. 대중화된 영상기술의 현 주소를 느끼게 한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설에 만난 조카들에게 <아바타>를 꼭 보라고 권했다. 영상미디어의 진보에 대한 상상력의 확장을 위해.


그런데 <아바타>에는 ‘모든 걸 다 차치하고’ 칭찬하지 못할 한계가 있다. 그것 때문에 <아바타>의 초반부가  불편했다. 그 불편은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의 현실로부터 비롯됐다. 


제이크는 전직 해병대원이다.

그는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타야 이동이 가능하다. 그런 그가 행성 판도라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쌍둥이 형 덕분이다. 형의 디엔에이로 아바타를 만들었는데, 그 형이 죽고 말았으니 이제 아바타도 무용지물이 될 판이다. 이 무용지물 아바타를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이가 제이크다.

이건 아바타를 만든 회사의 입장이다. 막대한 예산을 들인 아바타를 못 쓰게 되거나 말거나 그건 제이크와 무관하다. 오직 회사의 문제일 뿐이다. 


제이크의 참여는 다른 데 있다. 그는 판도라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한다. 여기에 판도라 행성에서 군 지휘자인 쿼리치 대령은 한 가지 더 근사한 제안을 한다. 나비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 제이크에게 새로운 다리를 주겠다는, 하반신 마비의 장애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제안이다.


<아바타>의 시대적 배경은 2154년이다. 현재로부터 144년 후다. <아바타>에서 미래인류는 판도라라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해 기지를 세울 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했다.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인 나비족과 인간의 DNA를 결합해 새로운 하이브리드 생명체를 만들 정도로 생명공학도 진보했다. 


이런 미래시대와 달리 전혀 진전하지 않은 분야도 있다. 제이크는 해병대에 자원했던 퇴역군인이다. 나름 국가를 위해 일한 직업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우주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에도 ‘여전히’ 신체 장애인이다. 그 이유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두 가지 정도로 짐작된다. 과학기술의 부재이거나 장애를 치유할 사회적 환경 - 경제력도 포함하여 - 의 미비다. 그런데 이 부재와 미비는 <아바타>의 현실과 비교하면 몹시 씁쓸하고 불편하다. 


제이크가 신체적 장애를 치유하지 못한 이유가 과학기술의 부재는 아닌 듯하다. 링크머신을 통해 아바타를 조정할 정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시대라면 하반신 마비를 해결 못할 정도로 기술이 낙후되었다고 볼 수 없다. 만일 그런 기술이 없다면, 그것은 기술의 진보를 다방면으로 연구하지 않고 오로지 우주과학에만 활용했거나 장애인의 치유엔 안중에도 없이 생명공학에만 활용하려 한 미래인류의 편협함이 원인이다. 


다행히 미래인류는 이 영역에서의 편협함은 없었다. 이는 쿼리치 대령의 제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쿼리치 대령은 제이크에게 임무를 완수하면 다리를 치유해 주겠다고 말한다. 실제 제이크가 보고한 정보를 토대로 나비족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제이크의 다리를 치유해 주기로 했다며 지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과학기술이 발달했음에도 제이크의 신체적 장애가 치유되지 않았다면, 이제 남는 것은 사회적 환경의 미비다. 제이크의 장애는 후천적이다. (몇 가지 관련 글을 보면) 그는 군 복무 때 장애를 입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그의 장애를 치유해 주지 않았다. 치료기술이 있음에도 외면했다.
이 때문에 제이크는 처음부터 인류가 나비족의 문명을 파괴하려는 것을 알면서도 쿼리치 대령의 제안을 수용하게 된 셈이다. 한마디로 다리치료가 우선이다 보니 나비족의 문명 파괴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바타>가 준 씁쓸함과 불편은 이 부분에서 나타난다. 144년 후 인류는 진보한 과학기술로 행성에 착륙하고, 디엔에이를 응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만큼 발전했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현재에서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했다. 장애를 치유할 과학기술이 있음에도 그 혜택을 받을 만한 기회는 여전히 없다. 그 기술은 다른 문명을 파괴하는데 우선 사용된다. 


군복무 중 사고를 당한 장애인을 치유해 줄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사회가 바로 <아바타>가 그린

미래인류며 미래사회다. 제이크의 하반신 마비가 퇴역 후에 발생한 일이라 하더라도 미래인류가 장애인의 치유에 대해 관심이 높지 않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그것을 장애인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와 연관짓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의 재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제도는, 과학의 발전만큼 비례해 진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바타>의 상상력은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을 만들고, “킬로당 2천만불”하는 운석을 만든 정도의 수준이다. 그것뿐이다. <아바타>의 상상력은 미래인류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는 제로다. 진보한 과학기술을 인류가 겪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

결국 <아바타>는 말한다. 과학기술이 진보하더라도, 그것이 곧 미래인류의 존엄을 위한 진보는 아니라고. 과학의 진보화 시대에도, 사회적 평등이 강화되거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투자가 높아지는 그런 사회는 아니라고.

  

이 분야의 상상력이 <아바타>에서 구현되었다 해도 영화 <아바타>의 구성엔 큰 지장이 없다.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할 제이크의 동기부여는 다른 이유들로도 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에 대한 <아바타>의 상상력 부재는 불편하다.


아마도 상상력 부재의 원인은 2010년 현재인류가 가진 인간 존엄을 위한 상상력의 빈곤에서 나왔을 듯 싶다. 현재도 수많은 과학기술은 결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 이 현실과 현재의 빈곤은 144년이 흐른 후에도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아바타>엔 미래사회의 과학은 있어도, 미래인류의 존엄은 없다. (2010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