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희망은 작고 부질없지만 그것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
민중을 신뢰하는 어느 정치 지도자의 말처럼 의미가 깊다. 힘도 느껴진다. 백성들이 역사를 만든다니, ‘섹시’하기까지 하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문구는, <스카이라이프>에서 KBS 사극 <추노>를 소개하는 카피다.
이 카피는 <추노> 홈페이지에 게재된 작가 천성일이 한 말의 일부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희망은 작고 부질없지만, 그것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3월 4일까지 24부작 중 18부를 마친 <추노>에서 “백성들의 희망”을 “확인”할 길은 없어 보인다. 작가가 가졌던 제작의도는 실패한 걸로 보인다. 아직 6부작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이 진단이 성급할 수 있으나, 7부 능선을 걸어온 시점에서 보면 ‘우물가서 숭늉 찾는’ 조급함만은 아니다.
1.
<추노>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9년, “한반도 전체 인구의 47퍼센트, 한양 전체 인구 53퍼센트까지 육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대를 두고 제작진은 홈페이지에 밝힌 ‘기획의도’에서 “거리에 나가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절반 이상이 되는 세상”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의 삶에서 희망이나 꿈, 전망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그런 세상”이었으며, “절반 이상이나 되는 인생의 값어치가 단지 얼마짜리 돈
으로 결정된 그런 세상”이었다고 덧붙인다. “절반 이상되는 이들의 사람답게 살고픈 바람이 오직 '도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고 진단도 있다.
아울러 작가 천성일이 얘기한 ‘어떤 시대에 쓰는지’의 그 시대, 즉 2010년을 택한 이유도 설명된다.
“어쩌면 화폐가치가 인생의 값어치로 손쉽게 매겨지고 '88만원 세대'라던가, '비정규직 확대'와 같은 문구들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하는 현재의 모순을 그 시대와 등가로 놓을 순 없다하더라도 맨몸으로 부딪혀 싸우지 않고서는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랍답게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언이 아닌, 가정과 추측을 전제로 쓴 글이지만, 드라마 <추노>가 ‘어떤 시대’에 쓰여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추노>는 말한다. ‘궁중사극’도, ‘영웅사극’도 아닌 ‘길거리사극’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각자의 절박한 바람들이 어떻게 좌절해 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좌절해가면서도 어떻게 모여 역사가 되어 가는지를 보고자 한다”고 그러나 현재 18회까지 방송된 <추노>에는 “역사를 만”들 백성이 없다. “작고 부질없”는 행동들만 존재한다.
2.
백성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의미는 단지, 한 시대의 구성원으로 살아왔다는 것만으로 현상화 될 수 없다. 만일 이 정도가 백성들이 만든 역사라면 이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모든 백성이 각자의 역사로 살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역사로 남으로면 뭔가 세상의 흐름에 의미있는 방점을 찍는 존재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방송된 <추노>에서 “백성들의 희망”을 만들 만한 가능성을 지닌 인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추노꾼 이대길은 여전히 자신의 작업인 추노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주인을 피해 달아난 종을 붙잡는 건 당연하고, 이로써 나라의 기강을 세우니 그 또한 나랏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추노질이 사랑하는 언년이를 찾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해도, 그 선택은 지극히 개인적인 합리화 일뿐이다.
이대길의 모습에서 위악적인 구석이 종종 발견되는 점에 미뤄, 반어적 행동으로 이해한다 하더라도 “절반 이상되는 이들의 사람답게 살고픈 바람이 오직 '도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세상”에서 노비를 잡으러 다닌 이대길에게 “백성들의 희망”을 건다면 이는 백성들의 희망에 대한 모독이다.
송태하 또한 “백성들의 희망”을 말하기엔 역부족이다. 18부작이 방송되는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곤 언년이를 보호하는 것과, 소현세자의 아들 석견을 찾아 그의 안전을 확보한 것뿐이다. “조선최고의 무사”답게 그간 수차례 싸움에서 그 능력을 펼쳤으나 그것으로 끝이다. 굳이 찾자면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양반의 무리들이 원손을 앞세워 정권을 찬탈하려 할 때, 뜻을 달리했다는 것뿐이다.
김해원은 이미 ‘민폐언년’이란 평가로 확인할 수 있듯이, 희망을 말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18부에서 죽어버려 <추노>와 인연을 다한 천지호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마지막에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황철웅을 죽이려 했지만 그건 사사로운 원을 푸는 일이었다. 오히려 천지호의 근본은 저자거리의 왈패로, 힘없는 백성들에겐 적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추노>에서 백성들의 희망을 말할 만한 이들은 이제 ‘업복이 일당’뿐이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고 밤마다 총을 들고 나가 양반들을 살해한다. 그러나 이들 또한 의식이나 행동의 진전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밤마실 의 반복만 거듭된다. 이 와중에서 업복이는 그나마 자신의 총질로 만들 다음 세상에 대한 고민을 보인다. 그러나 그 고민도 딱 그만큼이다. 드라마가 회를 거듭해도 진전이 없다. 뫼비우스의 띠에 갇혔으나, 그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느낌이다. 노비가 제 스스로 의식의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는 게 ‘리얼리티’ 일 수 있으나, <추노>는 이를 방치한다.
3.
18부까지 달려온 <추노>에 대한 평가는 간결해 보인다. 비록 기획의도는 거창했지만 <추노>도 천상 연애사극물일뿐이다. 따라서 남은 6부작의 흐름도 예감된다. 김해원을 둘러싼 송태하와 이대길의 갈등 또는 협력 속에서 정승 이경식과 활철웅에 대한 복수로 흘러갈 것이다. 이들의 근거지로 짝패의 산채가 활용될 것이다. 여기에 업복이 일당의 양반사회로부터의 탈출 정도가 덧붙여 질 듯 싶다.
이제 6부작 남은 시점에서 이대길과 송태하, 또는 업복이 일당이 개과천선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말한다면, 그나마 유지해 온 연애사극물마저 망치고 말 것이다.
백성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서려면 반드시 백성들이 나서 혁명을 이뤄야만 형상화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500년이 양반사회였음이 역사적 사실인데, 공상과학이 아니라면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한반도 전체 인구의 47퍼센트, 한양 전체 인구 53퍼센트까지 육박한” 그 시대를 배경으로, ”맨몸으로 부딪혀 싸우지 않고서는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랍답게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이 시대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추노>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굳이 <추노>가 이 문제를 풀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제 <추노>의 75%를 시청하고 난 뒤의 소감은 훨씬 간결하다. <추노>가 실패한 게 아니라, 추노의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가 오버였다. 맞다. “사극은 ‘어떤 의도로 제작하는지’ 보다 ‘어떻게 형상화 하는지’가 중요하다.” (201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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