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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riting Story

선영이는 행복하다(하)

 <My Writing Story> - 글, 인터넷과 놀다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고 흥미로운 일은 거듭 일어났다. 우연히 내 이메일에 들어가보니 낯선 편지가 들어와 있었다. 클릭해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와 있었다.


“처음에는 님의 글을 읽고 저희들이 생각했던 의도를 너무나 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더군요. 과연 님의 의구심을 완전히 풀어 드릴만큼 컨텐츠를 잘 만들었는가 하는데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만들다 보니 처음의 철학을 잊고 어떤 부분은 채우는 데에 급급하기도 했고 약간의 상업주의적 냄새가 나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켜봐 주세요. 제가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은 여성을 위하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였기에 점차 곳곳에서 그런 향기가 풍겨 나올 것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마이클럽의 내용을 채우는 많은 분들이 따끔한 충고에 감사하며 함께 모여 업데이트 원고를 다시 읽어보곤 했답니다. 혹, 시간이 되시면 한번 만나 뵙고 많은 충고 듣고 싶습니다. 이 밤, 시간 핑계대며 정신없이 앞으로만 나간 스스로를 반성할 기회를 주신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선영이’가 보낸 러브레터인가! 선영이 광고를 만근 여성인터넷 회사의 고위 관계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회사와 이해가 걸린 일이니 칭찬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글에서 나름대로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짤막하게 답장을 썼다.


“… 아무튼, 감사합니다. 글에 대해 답한다는 게 쉽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제 글은 OOO님의 회사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글을 읽으셨다니 잘 아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인식이겠죠. 아침에 우연히 티비에서 선영이 광고를 보았습니다. (제 집에 티비가 없었는데, 참 우연이었죠.)
그래서 무척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묘하게 제 주변에서 돌아가는 선영이에 대한 상황 등이 말이죠. (실은 크게 보면 이미 다른 언론이나,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저는 제가 알아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아직 OOO님께서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에는 못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여성을 위하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를 잃지 않길 바랍니다. 제가 감히 충고를 할 입장은 아닙니다. 따라서 달리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OOO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갑자기 바쁜 척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에… ”  

 

연애는 사적이지만, 또한 사회적이다

반론기사를 올린 이후 선영이 기사를 썼던 <오마이뉴스> 기자가 다시 글을 올렸다. 글의 많은 부분은 필자의 사적인 연애경험담으로 흘렀다. 내 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짧았다.

“내 글을 읽고 노정환 기자가 반박 기사를 썼다. '앞으로 연애와 사랑에 대한 담론을 올리겠다'고.

일천한 배움과, 인식 얕은 내 주제라 거창하게 '담론(談論)'이라 하니 겁부터 난다. 하지만 '사랑'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식자(識者)들에 의해 이성적으로 연구돼야 하는 성질의 것일지, 그래서 정리된 하나의 '론(論)'이나 설('說)'이 되어야 옳은지는 의문이 남는 게 사실이다.
 

한 시절 누구보다 조국을, 민족을, 민중을 사랑했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그들이 사랑했다던 것들을 대변해야 마땅한 여의도 돔형 석조건물에 들어가서 보여주는 상식 이하의 행태들. 그들이 사랑에 관한 '론'이나 '설'을 몰라서 그럴까. 천만에. 그 이유는 그들이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사랑을 배우고 행한 기계적 교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세칭 식자의 사랑이란 여기서 한 발짝도 더 나갈 수 없는 게 아닐까?”



연애는 사적이지만, 사회적입니다.

“지난 토요일 글을 올릴 때, 결심 했었죠. 반론이 들어와도 일단 중지하자. 사실 저는 논쟁에 익숙치 못한 고로 논쟁은 자칫 감정싸움처럼 비칠 여지가 많기 때문이죠.(어떡합니까. 우리의 잘난 교육자들이 논쟁을 가르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일단 글을 올린 이상 책임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책임의 일환으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다른 담론들을 모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굳이 ‘선영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연애를 말할 '꺼리'들은 무궁무진하니까요.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은, 물론 이번엔 공식적인 기사가 아니라 그냥 이처럼 기사에 대한 의견으로 올립니다.


우선 몇 가지 글을 쓰기 전에 공유했으면 하는 점은, 이번 글을 쓴 필자의 의도가 제가 글을 쓴 의도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이렇게 다시 글을 올리는 이유는 필자의 이 부분이 맘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연애와 사랑에 대한 담론을 ~ 정리된 하나의 '론(論)'이나 설('說)'이 되어야 옳은지는 의문이 남는 게 사실이다.’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의하지 않는 나머지 부분은 제가 표현한 담론이란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지금 필자가 쓴 글처럼 그런 글을 써보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사랑이 연구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인지에 대한 필자의 의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연구되어야 합니다. 논의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장은 없고 이론만 있는 식자들의 목소리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연애는 사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둘러보십시오. 개인간의 사랑에도 사회성이 녹아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간통죄가 될 수 있겠죠. 논의하자면 길겠지만, 도대체 국가가 왜 개인의 연애에 개입해야 합니까. 아직도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연애는 사적이지만, 또한 사회적입니다. 사회적인 것은 모두 정치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애에 대한 얘기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사랑을 배우고 행한 기계적 교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쓴 이 표현은 자칫하면 제가 사랑을 이성적으로만 바라보려 한 것처럼 보일 여지가 있어서 언급합니다. 다시 제 글 읽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과 감성은 무 베듯이 나눌 수 없다고 봅니다. 얘기가 용두사미로 된 듯 합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필자와 이런 만남이 즐겁습니다. 앞으로 선영이에게 관심은 갖겠지만, 선영이를 중심으로 한 연애 얘기는 중단하겠습니다.”


 

이번 논쟁 아닌 논쟁에서 거론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연애’라고 표현하는 게 의미에 맞다. 일부 사람들이 반론을 펼치면서 ‘그 돈 있으면 불우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라’는 식으로 사랑을 포괄적으로 해석해 버린 이들에게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이런 부분이 우리 사회가 아직 토론과 논쟁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교통사고로 다투다가 반말했다고 주먹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이 이쯤에서 끝나려나 싶었다. 그런데…


4월 4일 오후 <오마이뉴스>를 보니, <오마이뉴스>가 현수막을 내건 것을 지지하는 글이 올라왔다. 동명이인이 많은 이름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전에 <말>에서 활동했던 기자임이 거의 확실했다. 그 글은 이전 글들을 안 읽었다는 전제를 걸었다. 그러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또한 내 글에 대한 직접 거론이 없어서 그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럼에도 이 반론을 읽으면서 묘한 상황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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