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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riting Story

선영이는 행복하다(상)

 <My Writing Story> - 글, 인터넷과 놀다①

 

“선영아 사랑해”

새천년 첫 봄인 3월. 서울과 지방 등 거리에 나붙은 현수막에 쓰인 글자였다. 이 현수막에 관해 <오마이뉴스>에 기사가 올랐다. 그 기사를 읽고는 반론을 썼다. 도식과 획일이 아닌 다름과 열림을 말하고 싶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날을 전후해 내 주변에서는 ‘선영이’를 둘러싸고 흥미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글로 나눈 연애’에 빠졌다.


3월 말 ‘선영아 사랑해’란 문

구를 본 후, 개인적으로 취재에 들어갔다. 월간 <말>에서 다룰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마음에서 스멀거리는 궁금함에 내민 취재였다. 그 과정에서 <오마이뉴스>가 내건 반박 현수막을 보았다.

“선영아, 사랑을 팔지 마라. 다신 너를 만나지 않겠다”

그제야 관련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것을 알았다. <오마이뉴스> 기사는 ‘선영아 사랑해’라는 현수막에 대한 비판이자 반박현수막을 내건 배경을 담고 있었다.

   

“…부탁입니다만 앞으로 '사랑'을 가지고 뭔가를 광고하실 분들은 제발 의도를 확실히 밝혀주세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세요. 저는 아직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사람입니다. 의도가 분명하면, 사랑을 값싸게 파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값싸게 사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저의 의도요? 단순합니다. 제가 플래카드를 내건 이유는 몇 시간 동안 저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던 그것의 값쌈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 기사를 읽고 슬펐다. 다음날인 4월 1일 토요일, 출근하자마자 반론을 준비했다. 일단 <오아미뉴스> 기사를 프린트해 다시 확인했다. 두어 시간에 걸쳐 반론을 썼다. 


선영이는 행복하다,
<오마이뉴스>의 감성적 상상력이 불행할 뿐이다



봄날이 슬프다.

빈약하고, 빈곤한, 외롭고 추운, <오마이뉴스>의 감성적 상상력이 슬프다. 이 슬픈 봄날에 나는 '선영아 사랑해'를 더욱 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다. 갈짓 자로 걷는 이 시대에 묻혀버린, 우리의 감성적 상상력의 왕성한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랑의 순수함을 팔았다는 광고에 기댄 <오마이뉴스>의 서글픔을 잊기 위해…


일상에 나를 묻어두고 살다보면, 가끔씩 자본주의도 아름답다는 착각을 한다. 일상에서는 좀처럼 자본의 지난한 집약과 축적은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자본의 힘으로 가꾼 현상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선영아 사랑해'란 문구를 보고 처음 느낀 것은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착각은 아니었다.


'선영아 사랑해'가 내게 준 것은 감성적 상상력에 대한 훈련이었다. 지난 일요일 대학로에서 그 문구를 처음 보았을 때, 누군가처럼 "몇 시간 동안"은 아니었지만, 내 가슴도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었다. 그 감정에 그 현수막의 빈 귀퉁이에 '선영인 좋겠다'는 낙서라도 해 두고 싶었다.
대학로, 그 곳을 들러 본 이들은 알리라. 그곳에 붙은 수많은 포스터들. 그 안에서 본 선영이는 부러움이고 아름다움이었다. 봄의 새 햇살이었다. 이 팍팍한 일상에서 남의 사랑이지만, 저처럼 감동을 주는 방법으로 사랑고백을 한 용기도 부러웠다.


그런데, 그 현수막에 대한 반박이라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영아 사랑해'에 대한 반박은 빈약하고 외롭고 춥다. <오마이뉴스>(-굳이 필자가 아니라, <오마이뉴스>라고 한 것은 홍대앞에서 본 붉은 글씨의 <오마이뉴스> 사이트 주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 역시 <오마이뉴스> 기자로 등록돼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가 진보적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진보, 우리 안에 있는 또다른 슬픔을 느꼈다. 진보의 상상력 부재이고 빈곤이다.


이제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가장 효과가 뛰어난 광고는 '성적(性的) 감수성'에 호소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광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플래카드를 내건 광고주의 전략은 성공했다.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성공한 티져(호기심 유발)광고의 사례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뿐인가?


사람들은 가슴속에 미약하게나마 일렁이고 있던 '사랑'이라는 깃발, 그 깃발의 순수성을 한 번 더 의심해야 했다. 우리 시대는 사랑마저도 물품거래의 원활함을 위한 목적적 대상물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슬픈 현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게 했다. <오마이뉴스>가 반박의 끈을 놓치고 있는 지점이다. "사랑마저도 물품거래의 원활함을 위한 목적적 대상물"이라는 평가를, 그 판단을 하기 전에,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저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던 그것"에 먼저 감사해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 주변의 누가 언제 그렇게 사랑에 대한 진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한 적이 있는가. 그런 기회를 만나기가 좀처럼 쉬운가. 적어도 그런 기회를 부여한 '선영아 사랑해'에게 감사를 했어야 한다. 그 감사는 그 막대한 물량을 투여한 자본주의를 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뒤늦게 사실을 확인하고 깨달은, 자본주의를 착각하게 만든 점은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그 이후에 비판할 일이다.


'선영아 사랑해'는 그 태생이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인지라, "물품거래의 원활함을 위한 목적적 대상물"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광고를 본 이들에게 감성적 상상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설렘을 주었다. (이런 광고를 만든 기획사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어떤 놈은 돈도 많다'는 부러움과 시기까지를 유발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성찰의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대체 남이 사랑 고백하는데, 왜 시기하는가. 신의 사랑이 아닌 남녀의 사랑이라도 사회를 훈훈하게 만드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음을, 연애를 해 본 이들이라면 충분히 깨닫고 있는 일 아닌가? 주변에 연애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관계도 좀 더 밝아질 수 있다.)

선영이가 사랑을 팔았을까? 아니다. 선영이는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자극하는지를 새삼스럽게 깨우쳐 주었다.


대학로에 나붙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온 몸을 발가벗기는 몇몇 연극포스터들보다 선영이는 다 아름다웠다. 더 순수했다. 주저리주저리 써 놓은 포스터들보다 단 여섯 글자를 써 놓은 그 현수막이 더 나의 감성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자극도가 웬만한 연극 한 편을 보고 난 느낌보다 못하지 않았다면, 지나치게 연극을 비하하는 것일까.
선영이는 자본주의의 순수성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우리네 마음 안에 잠자고 있던 감성적 상상력을 깨운 것이다. 인터넷 업체가 사랑이란 단어를 써서 사람들을 혹하게 한 것이 사랑을 값싸게 만든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의 순수를 찾기 위해 빌려다 본 비디오는 무엇인가. 극장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본 영화는 무엇인가. 사랑의 감성을 느끼겠다고 빌려다 본 비디오는 선영이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게 한다. 영화 한편 제작하는 게 뉘 집 개 값이든가. 그 막대한 자본을 들인 비디오(영화)를 보며 찾는 사랑은 순수한 것이고, 도심 거리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느낀 첫 감정, 그 설렘은 순수하지 않다니. 이건 아니다.


더욱이…. 대학로에서 현수막을 본 다음날, 나 역시 몇몇 군데에서 그 문구를 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문구에는 누가 붙였다는 단 하나의 흔적도 발견할 길이 없었다. 나흘 후 그 단서를 잡은 것은 버스 광고였다. 버스에 광고를 했다면 광고대행사를 통했겠지. 버스운송조합에 전화를 걸어, 한 일간지의 아무개 국장을 거쳐, 한 광고기획사까지 추적했더니 대략 감이 잡혔다. 그래서 은근히 제 2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3월의 마지막날, 홍대 앞에서 '선영아 사랑을 팔지 마라'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보았다. 누군가 접어버린 그 현수막을 일부러 펼쳐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www.ohmynews.com

그 현수막에 빨간 글씨로 적인 인터넷 주소였다. 2탄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아! 이게 2탄인가 보다'싶었다. 눈치 없게도 나는 그것이 반박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제1탄에 대한 반전을 시도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의심이 들었다. <오마이뉴스>가 대흥기획에 의뢰해 광고를 제작할 자금력이 있을까?


그때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며칠 전, 그 광고를 보고 난 다른 생각을 했었다. 광고 업체도 표시되지 않은 저 광고를 등지고서 다른 광고를 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최근 전국에 나붙은 '선영아 사랑해' 란 광고를 보셨습니까. 당신이 그 현수막의 주인공이 되어 보십시오 당신의 선영이에게 예쁜 봄 화분 하나를 선물해 주십시오.”


<오마이뉴스>도 그쯤에서 생각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무튼 그쯤에서 생각을 접었는데, 오후에 문화일보에 난 가사를 보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그게 반박이었단다.


그런데 그 현수막은 단순히 반박만을 담지는 않은 듯 했다. 그 현수막은 <오마이뉴스>에 대한 홍보물이기도 했다. "근무하는 사이트"를 알린, 소속을 밝히는 당연한 행위였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오마이뉴스> 홍보물에 다름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오마이뉴스>는 사랑의 순수함을 팔았다고 비판한 광고에 기대어 홍보를 하는 서글픈 모습을 연출하고 말았다.


랑에 대해, 연애에 대해. 감시의 끈을 놓지 말자

기자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선영이를 내건 업체는 여성전용 인터넷 사업을 하는 곳이다.(현재 취재는 이곳까지 되어 있다.) 그래서 사실 미심쩍다. 여성전용이라면 지극히 상업적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영아 사랑해'가 사랑을, 순수를 팔았는지의 여부는 그 인터넷의 내용을 본 후 평가하자.


그래서 제안하건대 연대하자.

<오마이뉴스>와 이 세상에서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는 이들과,

그 사랑이 현실에서 왜곡되지 않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이들과,

사랑에 담긴 보수적 시각과의 한판 싸움을 준비하려는 이들과.

그러나 주의하자. 사랑은 이성적 판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주장만으로 사랑을 가꿀 수는 없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성적 상상력이다. 이 봄에.(<오마이뉴스>. 2000.4.)



 토요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고 퇴근했다. 그 후 <오마이뉴스>를 본 것은 4월 3일 12시 무렵이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에 들어갔을 때 곧바로 내 글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 글은 앞에 쓴 홍 기자의 글을 클릭해서 읽어야만 볼 수 있는 형태로, 반론 기사로 실려 있었다.

내가 쓴 기사를 보았더니, 그 아래에 기사에 대한 몇 개의 평이 올라와 있었다.


“요는 성공할 사랑(이런 사랑!)만 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실패할 사랑 100번 하며 쓰고 단 맛 보아가는 과정의 독려, 그렇게 사랑의 '환경'을 배워가는 것이 중요. 둘만의 사랑, 폐쇄적 관계, 대상으로의 집착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러브스토리가 지겨운 현실이고 보면, 이번 이 '불순물 섞인' 광고는 우리에게 약이 된 셈이죠.”

내 글을 긍정적으로 읽은 이가 쓴 글의 일부분이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지를 이해한 듯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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