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신화, '영원한 사랑''이 연재되는 동안 모두 56명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오마이뉴스>판 사랑예감에 쏟아진 독자의견은 다양했다. 주례사에 대한 반응, 이혼에 대한 찬반, 결혼제도에 대한 의견, 아울러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이 올랐다. 기사에 대한 긍정론 중에서 소박한 의견들부터 결혼제도에 대한 성찰까지 이어졌다. 56편의 글들 중 내게 무언가 작은 열림을 주었던 글들을 중심으로 ‘편파적으로’ 옮겨보면 이랬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입장하는 것과 폐백, 그리고 이혼입니다. 입장할 때 신부를 아버지가 신랑에게 데려다 주는 것은 그 쪽 집안으로 넘긴다는 뜻이겠지요. 폐백도 그런 의미가 강할 테구요. 첫 시작부터 그런 불평등으로 시작하는 결혼이니 결혼식만으로도 남자쪽에 우월감을 심어주게 되겠지요.
평소에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결혼할 때 결국 같아지던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보아왔으니까요. 설마 이혼을 각오하고 하는 결혼생활이 힘으로 누르거나 불행의 원인을 방치하는 권태로운 결혼생활일리 있겠어요?“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신성한 용어가 아니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의 폭 안에 들어가고 있다. 더 이상 절대적 관습으로 우리의 일상을 제어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결혼한 당사자들이 끊임없이 재조정하면서 같이 살고, 심지어는 깨끗이 손 털어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기존 사회는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지체다. 이 과도기에 피해를 보는 것은 이혼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회 속에서 불행해지는 것은 사회의 편견이 이들을 옥죄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혼을 좀 더 가볍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혼에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자. 낼 모래라도 얼마든지 서로 갈라설 수 있다. 그러면 오히려 신기하게도 결혼생활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결혼을 해야 재혼을 하지!"하고 외쳐보자!" 그러면 더욱 여유가 생길 것이다. 결혼을 강박으로 여길 때 그 사람의 결혼은 감옥이 된다. 그런 결혼은 죽어야 한다. 함 과감히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을 해보고 결혼의 신성함이란 이데올로기를 분쇄해 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책임있는 결혼과 책임있는 이혼이다. "결혼의 신성함"이라는 껍데기 뿐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적어도 한 때는 사랑했었을 사람을 원수로 만드느니 (그래서 그 와중에 "그 원수의 것"인 아이까지 불행하게 만드느니) 쓰잘 데 없는 이데올로기에 얽메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임있는 이혼"을 약속하는 것은 "책임 있는 결혼"의 필수조건이라 할 만하다.”
“댁은 아이들에게 "너 태어날래?"하고 묻고 낳을 겁니까? 어떤 분명한 어려움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임신-출산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미래의 행복을 바라봐야 하고, 그 미래의 행복에 이혼이 도움이 된다면 미련없이 이혼할 수 있어야 하겠죠.”
“이혼을 불행의 시작이나 범죄라고 말한다거나 아이들을 위해서 참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고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참고로 저는 남자입니다. 만일 제가 딸을 난다면 가능한 한 혼자살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도 뭐 남들 하는 대로 때가 되서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남들같이 살고 있지만 이혼한다면 어떻게 헤어져야 하는가 할 것도 가끔씩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한다고 제가 와이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중략)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거늘 배우자와 자식을 아직도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는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같이 있을 때 열심히 사랑하고 사랑이 변해 같이 있기 어려우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보다 더 중요한게 없다고 생각한다면요.”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평생 적당히 사는 것.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산업사회 유지를 위해 날조된 권위, 신성함은 벗어버리자”
“어차피 이혼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이혼에 대한 사회인식, 이혼녀(또는 이혼남 이혼한 부모를 둔 자녀)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혼률(제도)은 이미 서구화 됐는데, 이혼에 대한 인식(의식)은 아직 70년대를 못 벗어나는가!”
내가 쓴 세 편의 글은 모두 경어체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판단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기사 중 ‘사는 이야기’로 분류했다. 최근 이슈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발굴이라 불릴만한 정보를 소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반 기사처럼 정색하기엔 부적절해 보였다.
또한 ‘사는 이야기’ 방식을 빌어 생활글 형태를 띠는 것이 읽는 이들에게 좀더 편안한 마음을 줄 수 있을 듯 했다. <오마이뉴스>가 급성장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일반인들이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사는 이야기’ 방식인데, 그 방식을 나 역시 활용한 셈이다.
<오마이뉴스>판 사랑예감이 정리될 무렵 한 통의 전화와 한 통의 이메일이 왔다. 전화는 16일 오전에 결려왔다. 여성 월간지의 한 기자였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잘 읽었다며 권 교수님을 직접 인터뷰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사랑에 대해 그런 파격적인 입장을 갖고 계신데,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대안은 뭐냐는 거였다.
권 교수님을 뵙고 싶었고, 그런 궁금증도 풀 겸해서 권 교수님이 허락한다면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권 교수님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처음엔 할 수도 있겠다 했으나 여성지라는 잡지 매체 성격상 자칫 선정적으로 번질 우려를 비쳤다. 나 역시 이에 동의했고 자연스레 여성지 인터뷰 건은 취소되었다.
한 통의 이메일은 한 방송사의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로부터 왔다.
“'이혼에 관한 두 여성의 고백' 기사에서 얘기해주신 두 여성분의 이야기, 즉 '이혼'과 '결혼'의 당사자와 가족의 실제 얘기가 와 닿았는데요. 저희가 이 두 분과 통화를 할 수 있을까요? 실제 이혼하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살펴보면 주변에서도 적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적 인식은 바뀌어진 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작가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이 이메일에 대해, 내가 답변할 거리는 별로 없었다. 다만 내게 온 이메일을 내가 인터뷰한 두 명의 여성에게 알려주는 것이 내 역할의 끝이었다. 출연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두 여성의 몫이었다. 두 명의 여성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오마이뉴스>판 사랑예감도 일단락되었다. 그 마침표는 “논란의 장”에서 굳건히 자릴 지켜준 권 교수가 찍었다.
권혁범 교수는 <한겨레21> 4월 26일자 논단에 이번 <오마이뉴스>판 사랑예감에 대해 ‘이혼을 은폐시키는 사회’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권 교수는 “난 평범한 권리를 얘기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은 특히 남성들은 이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일까?”라며 놀라워했다. 길었던 일주일간의 사랑예감에 대한 권 교수의 입장은 이것이었다.
“이혼은 권장사항도, 그렇다고 ‘흠집’도 아니다. 인간이 오로지 ‘신성한 결혼’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혼할 권리는 인간의 행복권을 보장하기 위한 선택권으로서 인권의 한 목록에 해당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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