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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자전거의 짝사랑

1번국도 자전거여행① - 그의 자리에서, 그의 속도로



<6월 7일부터 10일까지 경기도가 주최한 ‘2010년 정신장애인 인권향상을 위한 존중과 회복의 자전거여행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이 프로젝트는 정신장애인 15명과 함께 수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1번 국도를 따라 해남 땅끝마을까지 가는 여행이다. 이 여행이야기를 세 차례 걸쳐 싣는다.>



1.
그의 존재는 자전거여행 첫날 저녁 숙소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나와 같은 방에 자게 되었다. 

그와 일행이 돼 수원에서 조치원까지 자전거로 달려왔지만 40명이 넘는 여행단에서 그의 존재를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여행단은 ‘시선을 넘어 희망의 페달로’이라는 표어가 적힌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얼굴은 두건으로, 머리는 동일한 색상의 헬멧을 쓴 상태였다.

이런 탓에 ‘정신장애인의 회복과 존중을 위한 자전거여행’의 주인공인 15명의 정신장애인을 알아보기엔 쉽지 않았다. 또한 첫날 자전거를 타는 동안 정신장애인이라고 표나는 특별한 행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숙소에서 만난 그는 낯선 이들끼리 만나면 으레 그렇듯 머뭇거렸다. 그 머뭇거림엔 조심성이 가득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가 보였다. 말을 걸어 인사를 나눠도 답변은 짧았다. 불안한 모습도 얼핏 느껴졌다. 그가 약을 먹도록 돌봐줘야 한다는 정신보건센터 직원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9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옷차림은 낮에 자전거 탔던 복장 그대로였다. 몸도 씻지 않은 채였지만, 그때까지도 그와의 대화법을 찾지 못했다. 


자전거여행 둘째 날은 조치원에서 삼례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첫날과 달리 여행단은 간격이 벌어졌다. 특히 고개를 오를 땐 서너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때마다 인솔자로 나선 경기도내 정신보건센터 직원들은 뒤쳐지는 이들과 동행했다. 여행단 앞뒤로 행사 차량이 붙어 안전사고를 예방했지만, 한두 명씩 떨어지는 경우엔 차량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 인솔자들의 역할이 필요했다.

 

나 역시 일행 뒤쪽에서 자전거를 타며 뒤쳐지는 이들과 함께 했다. 편도 2차선 도로에서 한 개 차선을 차지하고는 1차선 쪽 방향엔 인솔자가 달리고, 뒤로 처진 이들은 갓길 쪽에서 달리게 했다. 내 옆에는 정신보건센터 직원과 정신장애인이 번갈아 달렸다. 1번 국도를 자전거로 달리는데 뒤쳐지는 사람의 구분은 장애의 유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페달을 밟는데 힘이 부치는 이들만이 존재했다.


둘째 날엔 그와 두세 번 정도 함께 달렸다. 그는 늘 중간그룹의 뒷부분에서 달렸다.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으나 선두를 따라 잡을 만큼 가속이 붙진 않았다. 여행단은 한 시간 정도를 달린 후 10여 분씩 쉬며 여행을 지속했다. 휴직지에서는 미리 도착한 여행 진행자들이 준비한 이온음료 등 음료수와 쵸코바 등 간식을 먹었다. 그는 휴식시간이면 담배를 먼저 피웠다. 다른 정신장애인들과 달리 그는 별 말이 없었다. 그저 그늘을 찾아가 홀로 휴식을 취했다. 여행단은 삼례를 15킬로미터쯤 남겨둔 지점에서는 도로가 공사중이라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도 그와 같은 방에서 잤다. 그는 방에 들자마자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를 보고는 반색했다.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그가 즐겨하는 오락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그에게 씻고 자라고 얘기했다. 그는 샤워를 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셋째날 여정은 삼례부터 정읍까지였다. 정읍에서 광주로 가는 1번 국도는 경사가 급해 자전거로 이동하기 어려웠다. 이날도 그는 중간그룹의 뒷부분에서 달렸다. 뒤쳐지는 이들에겐 인솔자들이 옆에서 힘내라고 외쳤다. 오르막에서는 페달 밟는 속도에 맞춰 “하나 둘, 하나 둘…” 번호를 부쳤다. 어느 구간에선가 나도 그와 구호를 맞춰갔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100미터…, 80미터…, 40미터…”하며 눈대중으로 남은 거리를 불러주었다. 그는 쉼없이 차근차근 페달을 밟았다.


그 무렵 깨달았다. 그는 자전거를 잘 못 타는 이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안정적인 자세가 엿보였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자전거 타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탈 사람들이 필요했을 법 했다. 비장애인들도 자전거여행을 가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주변 사람들 누

가 그에게 자전거 여행을 떠나보라고 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니 그는 자전거를 타고 싶었어도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신장애인들이 그렇듯, 그 역시 세상과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 보여다. 


넷째 날이자 마지막 날, 나주에서 해남 땅끝까지 가는 길에서 또다른 그를 보았다. 강진을 지나 점심을 먹은 후에도 나는 그와 함께 달렸다. 여전히 그는 중간 그룹의 뒷부분에서 달렸다. 이제 그 자리가, 그 속도가 그의 자리라는 걸 알고 나니 큰 걱정이 없었다. 늦지만 꾸준히 페달을 밟으면 멀리 않은 곳에서 여행단이 기다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혹 못 간다 하더라도 마지막 그룹을 인솔해오는 일행들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 가도 됐다. 


“이제 얼마쯤 남았어요?”

처음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단 한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간혹 음료수를 마시라고 하면 그는 신병처럼 짧고 재빠르게 “네”하고 답변했을 뿐이었다. 4일간의 일정은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길은 정직해서 고갯길을 넘고 나면 내리막이 나타났다. 여행단에게 내리막은 꿀맛이었다. 그 맛은 또한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자전거를 타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했다. 그 역시 이 맛을 즐길 줄 알았다.


여정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는 걸 알고 나자 그는 내리막의 맛을 다른 방식으로 맛보았다. 해남을 얼마 앞두고 만난 내리막에서 그는 두 손을 모두 놓고 달렸다. 순간, 나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동안 인솔자로 행동할 때 주문한 것은 서너 가지 정도였다. 갓길로 빠질 경우 펑크의 위험이 있으니 차선 안으로 달리게 하기, 앞 사람 속도가 느려 자기 속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면 추월하기, 손을 놓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면 못하게 말리기 등이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놓고 달리자, 그동안 해온 인솔자의 노릇을 포기했다. 그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완주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처럼 보이는 행동을 막고 싶지 않았다. 옆에서 손을 놓고 달리는 이가 비장애인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그냥 두었을 것이다. 딱 그만큼에서 판단했다. 그 순간, 그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가 아니라 자유였다.  


자전거를 타 본 이들이라면 두 손 놓고 타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인 것을 안다. 물론 두 손 놓고 타는 게 위험한 것도 사실이다. 이 즐거움과 위험 중 택일해야 한다면, 그 기준은 자전거에 대한 숙련여부가 되는 게 합리적이지, 장애여부는 아닌 듯 했다. 통상 장애인이 좀더 비숙련에 가깝긴 하겠지만, 이틀 동안 살핀 바로는 그는 자전거 타기에선 장애인도 비숙련자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혹시나 싶은 상황에 대비해 2~3미터 간격을 두고 뒤따르며 지나는 차들을 살폈다.   


그는 자전거 뒤에 꽂은 깃발에 “완주 파이팅”이라고 썼다. 그는 스스로에게 한 그 약속을 지켰다. 4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사흘 동안

그의 속도로 달렸다. 그것까지가 내가 확인한, 올해 서른 네 살인 그의 나흘이었다.

그 나흘이 그에게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경기도가 주최한 정신장애인 인권존중과 회복을 위한 다섯 번째 자전거 여행에 참여한 일원일 뿐이었다고 그저 한 줄의 기록으로 끝날 수도 있다. 


명확한 것은 내 삶이다.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자전거여행에 좀 더 빠져들 것이다. 여행 방법도 바뀌고, 삶의 활력도 자전거로부터 더욱 얻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 정도는 명확하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가 명확해 보인다. 4일간의 자전거 여행이 내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한 계기를 주었듯, 그에게도 그 어떤 변화와 꿈이 자라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삶을 꿈꾸는 일에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없다는 명확한 진실 때문에 그것 또한 확신할 수 있다. (20100615)


<이 글은 다른 블로그에도 게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