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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단 한 번뿐인 이별이야기 1



15.

사망일시 : 2003년 8월 31일 08시 10분

직접 사인 : 패혈증

중간선행사인 : 패혈증

선행사인 : 간경화


14.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온 때는 8월 31일 일요일 아침 7시쯤이었다. 아버지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상계동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나 역시 옷을 챙겨 입었다. 지하철을 탔다.

마음엔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기다려줄 것이다. 이생을 끝내시기 전에 나를 기다려줄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다면 전날 내게 올 것 같았다. 내 꿈에라도 나타나 내게 뭔가를 얘기해 줄 것이다. 


지하철 2호선은 지상으로 나왔다. 성수역 부근 하늘엔 구름이 깔려 있었다. 일요일이라 지하철 안이 한산하다는 것을 빼고 나면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도시의 아침이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병원에 가 있는 동생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어. 8시 경에.”

“…알았어. 30분 정도 걸릴 거야. 누나들에게 연락해줘라.”


건대입구에서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탔다.

평상시처럼 계단을 내려갔다. 평상시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평상시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처럼 계단을 올랐다. 평상시처럼 플랫홈에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평상시처럼 지하철 안에 붙은 광고들을 보았다. 평상시처럼…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버지는 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을까!‘


13. 

8월 30일 토요일 점심 때는 수원에 사는 누나가 면회왔다. 중환자실 밖에서 함께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갔다. 며칠 사이에 아버지는 몰라보게 핼쓱했다.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언뜻 보아서 살아 있는지 이미 생이 끝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배가 움직인다는 게 그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아버지…  정환이 왔어요.”

“……” 

아버지의 손을 만졌다. 차가웠다. 피부가 두툼하게 불린 듯 했다. 울컥했다. 이렇게도 한 사람의 생이 끝나는가 싶었다. 

“아버지…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수술실에 들어가던 날, 수술 받지 않겠다고 하시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들었더라면 조금 더 사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도 남은 생을 조금 더 잘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급작스럽게, 이처럼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른 채, 방안에 쓰던 물건들 고스란히 둔 채 병원에 오시기 않았을 것이다. 주변의 술친구들이라도 한 번 더 만나고 삶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과유불급이 돼 버렸다. 다섯 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고 깨어나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몸의 부분들이 점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황을 느끼면서 아버지 역시 더 이상 사시기 어려울 거라는 것을 알았을까?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그 말이 끝나자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얘길 듣고 있었다. 고마웠다. 아플 텐데, 몸이 많이 아플 텐데, 그 의식에도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라도 얘기를 하려하니 고마웠다. 그러나 뭔가를 얘기하고 싶을 텐데, 저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또한 얼마나 답답할까! 내가 아버지에게 건넨 마지막 말에 아버지는 눈물로 대답했지만, 나는 그 대답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 눈물이 아버지가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지만. 나는 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울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침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번 울어버리면 그대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외롭게 혼자 사시게 한 것이며, 짐을 옮기고 나서도 여전히 내 일상에 쫓겨 전혀 대화를 할 수 없었던 시간이며, 여전히 화해하는 방법을 모르는 가족들이며, 그 어떤 것도 내 절제된 마음에서 모두 벗어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벗어나 버리면 나 역시 아무 것도 주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버리듯. 

 

기다리는 막내누나에게 면회시간을 주기 위해 병실에서 나왔다. 막내 누나는 10여분 정도 있다가 나왔다. 누나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막내누나와 단 둘이 점심을 먹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정작 아버지 얘기를 가장 많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얘기한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는 게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는 것이리라.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 누나는 아버지의 장례 얘기를 꺼냈다. 막내누나와 동생은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아버지 장례도 기독교식으로 모시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일은 다시 얘기를 해 보자고 했다.


애초 토요일 저녁에 가족들끼리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큰 누나와 둘째 누나가 약속이 어그러졌다. 결국 그날 저녁에도 누나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저녁에 어머니가 계시는 상계동 집으로 갔다. 아무래도 내가 병원 가까이에 있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화를 풀지 못했다. 어차피 낫지 않을 바엔 병원에 더 두지 말고 데리고 나와 버려라. 장례치를 거라면 화장해라. 그동안 먹은 보약이 오히려 암을 더 키웠다고 하더라. 간이 그렇게 안 좋은데도 술을 마셨는데 그 몸이 온전할 것 같냐.


분명 연민과 쓸쓸함이 있었을 터인데도 여전히 말투가 곱지 않았다.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에도 돈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생각했다. 그런 말들은 결국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속이 상하는 것에 대해 어머니는 화가 나신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말투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을 텐데. 지금 무엇을 어쩌란 말인가 싶었다. 왜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할까! 무슨 오기를 그렇게까지 부리나! 나 역시 사랑을 받지 못한 지라 그 마음을 알면서도 참아가며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날 밤 10시쯤 상계동 집을 나와 신촌으로 왔다. 가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12.

어려운 일인가! ‘다음’을 준비해야 하나!

수술 한 지 일 주일쯤 지나면서 아버지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회복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곳곳에서 들었다. 면회를 간 누나들은 누나들대로 어렵지 않겠냐고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어머니 역시 전화를 걸어왔다. 어렵다면 병원에 오래 둘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무기력하게 했다. 수술을 할 때 의사에게 얘기 했었다. 이전에 간이 좋지 않았다고, 간경화가 있다고. 나는 그 정도가 내몫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머지는 의사가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환자의 상태가 그런 상황에서도 수술을 하면 괜찮을지, 아니면 어느 정도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수술을 하지 않은 게 좋을지. 그 판단은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사는 뭔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 몫은 환자와 보호자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8월 29일 금요일. 아버지는 외과 응급실에서 내과 응급실로 옮겼다. 담당 의사도 바뀌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를 애기해 주었다. 수술도 할 수 없고, 상태도 좋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그것이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뜻일 텐데도, 나는 보다 확실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는 줄곧 에둘러 표현했다. 속으로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했을 법 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의사에게 한 얘기는 한 마디 뿐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덜 아프게 해달라고.


면회를 마치고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나는 아버지의 ‘다음’ 단계를 생각했다. 누나들에게도 아버지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찾았다. 영정을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땅한 사진이 없었다. 결국 지난 추석에 찍어두었던 사진을 한 장 챙겨 가방에 넣었다. 그 다음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큰집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선산에 자리가 있냐고 물었다. 형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마 없을 거라는 거였다. 그동안 연락도 않다가 이런 일도 전화를 하는 내가 싫었다. 돈을 마련해 둘 필요도 있었다. 급한 대로 이용할 수 있게 신용카드가 있는 통장으로 돈을 모았다.

그 정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행히 그 무렵에 월간지 원고는 모두 끝마쳤다. 월간지에서 남은 일은 이제 교정 보고 디자인을 검토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함께 월간지를 만드는 대진이에게 얘기를 했다. 어쩌면 마감 마무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는 챙겨야 할 것을 몇 가지 말했다.


11. 

8월 22일 토요일, 노조에서 무주로 수련회를 떠났다. 며칠 전부터 망설였다. 수련회를 가야하는지를 두고. 그러나 가기로 했다. 어차피 서울에 남는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면회 말고는 없었다. 대신 일요일날 아침 일찍 올라오기로 했다.


수련회 간 토요일 저녁에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간호사는 아버지를 바꿔 주었다. 어느새 이 정도 회복되었을까 놀랄만큼 아버지의 말은 기운찼다. 중환자실은 답답해서 죽겠으니 일반병실로 옮겨달라는 거였다. 약 1~2분 정도의 통화, 역시 그것이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당시 의사들은 주말을 넘기고 나면 대략 수술 결과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때쯤에 일반 병실로 옮기는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주말을 고비로 아버지의 상태는 나빠졌다. 며칠 후 다시 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몇 가지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하단다. 오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도저히 사무실에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둘째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둘째 매형이 서울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매형이 대신 병원에 갔다.


그 다음날 병원에 갔다. 병원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혼자 되뇌었다.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는 게 쉽지, 직장을 다니면서 매일 병원을 다니는 일은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때인가? 아버지는 별 일 없을 것이다. 조금 어려운 때를 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외과 중환자실 병동에 있었다.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메말라 있었다.

“정환이 왔어요.”

내 목이 잠겼다. 울지 않아야 한다. 아버지는 별일 없을 것이다.   

“조그만 참아요! 곧 나을 거예요.”


눈도 뜨지 못한 아버지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면회는 10분으로 끝났다.

면회가 끝나고 의사를 만났다.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수술부위가 터진 것 같다고 했다. 간성혼수가 왔다고도 했다. 평소에 간이 좋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합병증 증상이 보인다고 했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재수술을 한다고 해도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하루 이틀 더 두고 보며 외과 응급실에서 내과 응급실로 옮기는 문제를 상의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계속 / 200309)

<사진설명>
아버지가 30대 시절에 장사를 하시며 사용하셨던 손저울이다. 쇠고리가 있는 곳에 물건을 매달고는 오른쪽 저울추를 움직여 물건의 무게를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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