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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이생의 마지막 일들


단 한 번뿐인 이별이야기 2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단 한 번뿐인 이별이야기1


10. 

형수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나도 병원을 나섰다.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난 후, 누나들끼리는 간병문제를 전화로 의논했다. 누나들은 간병인을 사자고 했다. 나는 수술 끝나고도 며칠은 중환자들이 있을 거니까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했다. 나라고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며칠간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퇴원하고 난 후 어디에 계실 것인가가 더욱 큰 문제였다. 다시 가족들의 상황을 하나 둘 떠올려 보았다. 그 누구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선택해야 하는가! 다시 어머니를 달래볼까? 어머니가 버는 돈을 내가 줄 테니 아버지 간호해 달라고. 그것이 애정이 없이 가능한 일인가! 아니, 애정이 없이는 가능하겠지만, 미움이 남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여전히 자신 없는 문제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뒤로는 면회도 제한됐다.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뿐이었다. 수술한 날 저녁엔 동생이 들어갔다 왔다. 그런대로 괜찮다고 했다.


다음날 저녁엔 내가 면회를 갔다. 아버지의 몸에는 온갖 선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양 팔에는 링걸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코에도 호흡을 돕기 위한 선이 꽂혀 있었다. 팔과 다리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환자가 고통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간호사에게 펜과 쪽지를 부탁했다. 묶인 아버지의 팔을 풀었다. 아버지는 몇 글자 적었다. 

숨 잘 쉬어. 이거 잊이 말고 저리 가. 입원”

중환자실에 있지 말고 입원실로 가자는 거였다. 답답하셨던 모양이었다. 아버지에게는 한 삼사일 정도만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래도 글자를 적는 아버지를 보면서 고마웠다. 어려운 수술을 끝마치고 그처럼 숨을 쉬고 있는 게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상태가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처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아버지, 당신은 살아만 계셔라. 그러면 지금처럼 외롭지 않게 해 드리겠다.’


9. 

수술을 시작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나면서 수술이 끝난 환자들의 이름도 자막으로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수술을 끝내고 회복실로, 중환자실로 가는 환자들이 많았다. 어느 순간엔 응급실에 있던 환자가족이 와서 오열을 하기도 했다. 얼핏 듣기에 누군가 죽었다는 듯 했다. 간혹 수술을 마친 의사들이 보호자를 찾아와 수술 결과를 알려주기도 했다.

대부분 보호자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마도 나처럼 스스로가 별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까! 사람이 아프다는 것. 어디가 아픈지를 알고 수술을 한다는 것. 의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 의술이 미미했던 과거에는 자신이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죽어갔을까!


아버지의 수술은 4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6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시간동안 아버지는 진신마취 상태인 것이다. 4시간 동안 아무런 감각도 의식도 없이 살아있는 것이다. 단지 숨을 쉰다는 이유로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12시가 넘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은 ‘수술중’인 환자들의 이름 안에 있었다. 큰 매형이 전화를 걸어왔다. 큰 누나도 전화를 걸어왔다. 여전히 수술중이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끊었다.


오후 1시. 여전히 아버지는 수술중이었다. 이제 대기실에 있던 보호자들은 많이 빠져나갔다. 대신 오후에 수술을 시작하는 환자들의 보호자들이 새롭게 자리를 차지했다.

드디어 1시 30분쯤 아버지의 이름은 ‘중환자실’ 환자 쪽으로 옮겨 있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수술실을 나오는 아버지를 보았다. 머리엔 파란 헤어캡이 쓰여 있었다. 곧장 중환자실로 갔다. 그것으로는 상태를 알 수 없었다.


10여분 후에 수술에 들어갔던 의사를 만났다. 예상했던 대로 대장암은 두 곳에 있었다는 것, 의심했던 또 다른 곳은 다행히 대장암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삼사일 정도는 응급실에서 있어야 할 것 같다는 것 정도였다. 잠시 후 일반 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일반 병동에 있는 아버지의 짐을 빼 달라는 거였다. 일반병동에서 아버지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어제 사다놓은 음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신발을 챙기고 시계를 챙기고….


아버지가 집에서 가져온 가방에 짐을 넣고는 4층에 있는 응급실 환자 대기실로 왔다. 온돌방처럼 마련된 그곳에 있는 사물함에 아버지의 가방을 넣어두고는 복도에 나와 앉아 있었다. 대기실에는 10여 명의 아줌마들이 자리를 펴고 있는지라 함께 있는 게 멋쩍었다. 복도의자에 앉아 깜빡 잠이 들리기도 했다. 달리 무엇을 할 것도 없었고, 여전히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수술 뒤라 혹시나 싶어 자리를 지켰다.


그때 예상도 못한 큰집 형수님이 오셨다. 형수에게 수술 결과를 간단히 얘기했다.

나는 형제들과 거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산다. 큰집 형님이 서울 가양동쪽에 살지만, 일년에 한 번 정도 가는 편이다. 설날에 가족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다. 그것도 웬만하면 가지 않는데, 아버지가 가야한다고 하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가곤 한다. 더욱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이가 좋지 않게 되면서 큰집이든 외가집이든 묘한 관계가 형성돼 버렸다. 어머니는 큰집 친척들을 미워했고, 아버지는 외가집 친척들을 미워했다.

그럼에도 내가 형수에게 한 적에 비하면 늘 형수는 내게 잘 해주었다.


어린 시절 남원에 살 때 나는 다른 친구들이 ‘되련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무척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형을 둔 친구들이 형이 결혼하고 나면 형수가 그렇게 불렀는데, 형이 없는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언제부터인가 나를 도련님으로 부르는 사람이 생겼다. 물론 도련님이란 호칭을 들었을 때는 어린 시절 가졌던 아련한 기대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도련님이란 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형수와 옆자리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형수는 큰집 동생 결혼 할 때 빚내던 일 등 맏며느리로서 겪은 몇 가지 일을 내게 들려주었다.


8. 

8월 20일 아침 8시. 아버지가 수술 받는 날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누나들은 한두 차례 병원에 다녀갔다. 나는 아버지가 수술실로 들어가기 10여분 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동생이 와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수술실에 들어갈 채비가 거의 끝나 있었다. 담당 간호사가 몇 가지 추가로 채비를 갖췄다.

수술실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술받지 말자. 그냥 집으로 가자. 수술해봤자라니까.”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수술이 잘 되니까 그냥 편하게 계셔요. 수술 안 한다고 하지 말고요.”


그때 아버지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아이들 같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하던 모양과 흡사했다. 그러나 그때 부모님은 그런 나를 달래 주사를 맞게 했듯이 이제 나는 아버지를 달래 수술을 받게 헤야 했다. 이미 수술을 하기로 한 이상 아버지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했으면 싶은 마음뿐이었다.

10층에서 3층 수술실로 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3층에 내려가니 수술실 입구에는 10여 명의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 대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늦은 편이었다. 아버지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실 문은 닫혔다.


동생을 보내고는 혼자서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대기실 한쪽 귀퉁이에는 커다란 티비가 놓여 있었다. 아침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티비 화면 위쪽으로 수술중인 환자들의 이름이 자막으로 나왔다. 거기에 아버지 이름도 있었다.

여전히 내 마음은 담담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지켜보는 뿐이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나와 긴밀히 관련된 일인데도 손을 놓고 있는 상태. 내가 지극히 싫어하는 상태이지만, 그야말로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간간히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그것이 내 기도였다. 아버지는 나를 믿을 것이란 것. 당신이 나를 믿어주면 좋겠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좀더 편해졌으면 좋겠다는 것.


7. 

8월 20일. 입원한 지 이틀째인 화요일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진찰을 위해서 몇 가지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단다. 내 퇴근 시간이면 의사들도 퇴근을 하는 시간, 할 수 없이 수요일에 찾아 가겠다고 했다. 

수요일 다시 점심시간을 끼고 월차를 냈다. 아버지의 병실은 어느새 6인실로 옮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건강했다. 링겔을 꽂았지만, 링겔 꽂이에 의존해 혼자서 돌아다닐 정도였다. 앞쪽에 앉은 환자와 보호자들과 말인사를 나눈 모양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암을 앓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아버지와 함께 복도에 있는 휴게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내일 정도에 수술을 할 거라고, 그러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 수술 안 받는다는 얘기하지 말고 의사들이 하지는 대로 하자고.


그리고는 다시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복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려다가 머리를 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수술하고 나면 며칠 누워 있을 텐데, 그렇다면 오늘 머리를 감는 게 나을 듯싶었다. 머리를 감자고 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아버지의 머리를 감겼다. 한 손에 링겔을 꽂고 있어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바닥에 쭈그려 앉혔다. 수돗물의 온도를 미지근하게 조절했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에 끼얹었다. 머리에 비누를 칠했다. 아버지의 머리는 무척 작았다. 애초에 작았는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아졌는지 기억이 없다. 물로 머리를 행구고 그만두려 했으나 아버지는 한 번 더 비누칠을 하자고 했다. 언젠가 어머니는 그랬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머리는 곧잘 감아 빗질한다고. 다시 비누를 칠하고 물로 행구고…. 

그때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의 머리를 감겨 드린 게. 역시 그것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런 것보다도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도 내 머리를 이렇게 씻겨본 적이 있을 거라는. 그리고 어느새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아버지를 그때의 아버지처럼 씻기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고분고분 머리감는 일에 조용히 따라주는 아버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를 감긴 다음에는 발을 씻겨 드렸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아 드리고 다시 병상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두고 다시 병원을 나왔다. 저녁에라도 드시라고 다시 캔식혜를 한 박스 사러 나왔다.


집에서 식사를 잘 드시지 않을 때 아버지는 캔식혜를 즐겨 드셨다. 시골 분이라 다른 어떤 음료보다도 식혜를 좋아하셨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큰 슈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캔식혜를 할인해서 팔았다. 아버지는 종종 그 몇 백원을 아끼시기 위해 가까운 슈퍼를 마다하시고 그곳까지 가시곤 했다. 그래서 텅 빈 냉장고에 식혜가 끊이는 날은 그리 없었다. 

캔식혜 박스를 사다 주고는 다시 병원을 나왔다. 그 캔식혜 역시 내가 아버지에게 사다드린 마지막 음료였다. 


그날 의사를 만났다. 입원하기 전에 진찰하던 의사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 교수와 함께 아버지를 담당한 의사인 모양이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대장암은 예상대로 두 개가 있는데 인공항문을 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 안쪽에 의심되는 곳이 있긴 한데 그것은 수술을 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 아버지가 간 등이 좋지 않아 수술 후 응급실로 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
그리고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받았다. 나는 담담히 사인했다.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수술해야지 않겠냐고 누나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대장암이라면 그리 큰 암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알면서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