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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생태계/서른의 생태계34+39

'몸 속에 암이 있는데….'

단 한 번뿐인 이별이야기3

6. 

병실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의 간호 문제 때문이었다. 간호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인천에 사는 큰 누나. 이번에 고3인 아들 녀석이 있다. 남들과 비교해 극심한 뒷바라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고 3아들의 어머니다. 게다가 집에서 부업을 하는 모양인데, 최근에 다시 시작해 그 일을 그만 두기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중화동에 사는 둘째 누나. 결혼 전부터 하던 미싱일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는 그래도 둘재 매형의 벌이가 괜찮다 싶은데, 늘 그래도 부족하단다. 그러더니 몇 년 전부터 직접 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일반 부업거리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모양이다. 하긴 그 일은 그런대로 노하우를 갖고 있으니까. 간병을 하자면 직장 일을 빠져야 하는 상황이다. 휴가란 애초에 없는 곳이니 결근인 셈이다. 게다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있으니 그도 둘째 누나의 몫이다.


수원에 사는 셋째 누나. 사업에 실패한 셋째 매형은 얼굴을 본 지 오래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복갑한 일에 빠진 듯하다. 이전에 갖고 있던 아파트도 저당에 잡혀 넘어가고, 셋째 누나는 어찌어찌 해서 월세를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 동생.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 학원 역시 휴가라고는 없는 직장이다 보니 하루 빠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퇴근하고 저녁에는 강남쪽으로 가서 구연동화 연습을 한다. 평상시에도 밤 12시에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다.


어머니. 역시 일당을 받는 직장에 매여 있다. 그 일당 내가 준다며 그만두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역시 마지노선에서 택할 방법이다. 여전히 어머니는 아버지와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가족들의 이런 상황을 버젓이 알고 있는지라, 누구에게 언제 오라고 얘기도 못했다.


아버지의 입원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술을 드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연민이 가다가도 그런 소식을 듣고나면 화부터 치밀곤 했다. 그 화는 다시 젊은 시절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대했던 기억을 떠올렸고, 그 기억들은 아버지에게 여전히 불리한 것들이었다. 가족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지라,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뉴스는 될지언정, 핫이슈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일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지만, 어지럽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간병을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할 사람이 없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선택을 언제 해야 하는지를 망설이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입원한 날 저녁은 동생이 시간을 냈다. 화요일엔 누나가 들렀다. 누나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어머니도 전화를 걸었다.

“그 인간 그렇게 살려 놔서 뭐하냐?”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거리감. 진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나는 어머니의 그 오기까지를 받아 줄 여력은 없었다.


“그럼 병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냥 두라고. 일단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될 것 아냐? 걱정마. 엄마한테 뭐 하라고 안 할테니까!”

속으로는 간절했다. 어머니가 간병을 해주면 안 되냐고.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갈 때나 따라가 주면 안 되냐고. 그러나 누나들 모두 어머니는 간병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병원에 가면 분명히 다시 싸울 것이라는 거였다.


5. 

8월 18일 월요일. 전날 신촌에서 잔 나는 아침 일찍 상계동 아버지 집으로 갔다.

“병원에 가지 말자? 나는 암시랑토 않은데, 뭐하러 병원에 가서 돈을 쓴 다냐?”

입원할 때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던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그리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의사가 병이 있다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두고 어찌 있다요?”


아버지는 이전에 직장 다닐 때 갖고 다니던 검은 색 가방에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 넣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몇 번 있는지라 어쩌면 짐 싸는 게 수월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암일지도 모른데요!”

“… 그럴지 알았다. 어찌 네가 병원에서 하는 폼이 이상하더라 했다.”

“의사 말로는 수술을 하면 괜찮다고 하는데, 아직은 확실히 모르니까 일단 진찰을 받아보자는 것이니까, 한번 가보자고요.”


아버지는 아파트를 나서면서 손수 문을 잠그셨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아버지에겐 이생에서의 마지막 행동들이었다.

당신이 3년 반 정도 사셨던 아파트와도 마지막이셨고, 그 아파트 문을 잠그던 일도, 그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타시던 일도, 그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통해 당신을 보시던 일도, 그리고 그 아파트 단지의 쪽문으로 난 계단을 내려와 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큰 길도. 20여 년 전 낯선 서울로 와서 가장 먼저 대했을 상계동의 모습도.      


병원에서 입원 수속은 쉽게 끝났다. 애초 6인실로 예약을 했으나 병실은 3인실이었다. 아버지에게 환자복을 입히고는 밖으로 나왔다. 근처 수퍼에 들러 캔 식혜를 한 박스 사왔다.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있다가 병실을 나왔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를 까 싶어 아버지 가방에 내 명함을 한 장 더 넣어 드렸다.

일․때․문․에․바․빴․다. 

18일. 잡지를 마감하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쓸 기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것 말고도 충분히 바쁠 일들은 많았다.


4.

상계백병원에서 진찰은 간단히 끝났다. 동네 병원에서 준 소견서와 간단한 치료 결과물을 의사에게 건넸다. 의사는 이내 몇 가지를 훑어보더니 암을 인정했다. 곧바로 입원날짜를 잡는 협의가 이뤄졌다. 찾아간 날에 하자니 당장 15일 광복절에, 16일 토요일, 17일 일요일이 걸렸다. 결국 그 다음주 월요일에 입원하기로 했다. 약 10여 분 정도 의사의 설명이 끝나고 아버지를 먼저 내보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상태가 어떤지를.


두 군데 정도 암이 있는데, 다행히 자금으로 봐선 부위가 항문으로부터 거리가 있어서 인공항문을 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암이라는 게 어디로 전이됐을지 모르니 일단 몇 가지 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다시 의사에게 물었다. 대체로 암일 경우 당사자에게 얘기를 하는 게 좋으냐고. 혹시 당사자가 알아서 좋지 않은 수도 있냐고. 의사는 당사자가 알아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했다.  


진찰실을 나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갔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고는 입원 예약을 했다. 그때까지 아버지는 얌․전․하․셨․다. 이전 같으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투정과 고집을 부렸을 법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월요일에 입원한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와는 병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사무실로 가야했다.


상계백병원에서 노원역으로 가는 길에 비로소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간단히 말했다. 가족에게 얘기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큰 누나는 작은 누나에게 얘기를 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얘기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갑자기 속이 상했다. 당연히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망설이고 있다니. 그럼에도 그날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당장 나올 태도가 눈에 선했다. 그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염장을 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입원할 때까지는 말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노원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 들어오냐고. 월간지 9월호를 위한 준비가 한창 시작된 무렵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는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고집 같은, 오기 같은 심정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수술비는 내가 감당하자고 다짐했다.


3.

8월 12일. 화요일이 돼 점심시간을 끼고 반일 휴가를 내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상계동으로 와서 아버지집에 들렀다. 아버지가 병원에 가는 일을 거들었다. 의료보험카드를 챙기고, 바지를 입히고…. 다행히 아버지는 한두 번 병원에 가지 말자는 얘기를 하긴 했지만, 행동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종합병원에 대해 가진 불신은 컸다.
그것은 비록 의학지식이 없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 많았지만, 때론 간호사들이 치료를 할 때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은 탓도 있었다. 아울러 아버지 스스로는 종합병원에 갈 정도면 큰 병이라는 생각에 미리 가길 원치 않았는지도 몰랐다.


아파트 단지에서 샛문으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을 때 아버지는 건강하셨다. 이전처럼 10여 개의 계단을 내려 올 때도 굳이 부축하지 않아도 됐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비록 몸 안에 암이 있다고 했지만, 곁으로 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굳이 이용하지 않았다.


여름 햇살이 따가워 조그만 가로수가 용케 만든 그늘 자락을 아버지에게 내 주었다. 낯선 퐁경이었다. 이처럼 아버지와 내가 버스를 타겠다고 함께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좀처럼 아버지와 어디를 함께 다닐 기회가 없었다. 간혹 함께 가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때는 택시를 이용했다. 그러니 이처럼 부자가 나란히 서서 무엇인가 같은 것을 기다린 적은 드물었다.

‘저 몸 안에 암이 있는데 아프지 않을까?’

버스를 기다리면서, 말라버린 아버지의 몸을 보며, 헬쓱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간혹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프지 않을까!


2. 

8월 초, 의사와 약속한 날에 병원을 찾지 못했다.

일․때․문․에․바․빴․다.

월간지 창간을 준비할 때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다시 곧바로 시작되는 2호 발간을 위한 기획을 해야 했다.

어차피 암이라면 하루 이틀 차이가 큰 문제는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로부터 다시 3~4일이 흐른 후 동네 병원을 찾았다. 전날 아버지 집에서 잠을 잤다. 아침 9시에 병원 개원 시간에 맞춰 의사에게 갔다.


병원은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의사가 바뀌어 있었다. 이번 의사는 대장, 항문 쪽에 전문의였다. 의사는 내시경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대장암이 확실하다고 했다. 의사는 친절하게 내시경으로 찍은 아버지의 대장 내부를 보여주었다. 문제의 혹 부분에서는 약간의 설명도 곁들였다. 이윽고 의사는 소견서를 써 주겠다며 종합병원으로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고 했다.


의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마치고,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10분 남짓 걸려 상계 백병원으로 갔다. 진찰 날짜를 예약해야 했다. 상계백병원 2층 외과에 들러 다음주 화요일에 진찰 예약을 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가족들 누구에게도 애기하지 않았다. 상계백병원에서 진찰을 받기 전까지는 얘기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결과가 좀더 명확해질 때까지 나 혼자 알고 말자 싶었다. 누가 안다고 해서 당장 무엇이 바뀔 것도 없었고, 되레 걱정만 앞설 것이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동네병원에서 보니 큰 병원에 가서 확인할 것이 있다는 정도로 얘기를 하고는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을 비워 두시라 했다.


1.

7월말 월간지 창간 막바지 였다. 한창 바쁜 어느 날, 근무시간이었다.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는 2~3분 정도 이뤄졌다. 상계동의 동네 병원이었다. 노상준씨가 아버지 맞냐며, 이내 용건을 얘기했다. 아버지가 변비가 있다고 해서 진료를 받았단다. 아무래도 대장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다. 좀더 정확한 결과는 일주일 후쯤 나온단다. 그 무렵에 한 번 방문해 달라는 거였다.


대장암. 

내 마음은 담담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의사와 통화를 할 때도 차분했다. 단지 암이라는 이름이 약간 두렵긴 했지만. 아니 어쩌면 그런 걸 느끼지도 못할 상황이었는지도 몰랐다.

일․때․문․에․바․빴․다. 


지난 5월에 한번 병원 신세를 지는 사건을 겪은 이후 아버지는 점차 회복세였다. 큰 병원은 좀처럼 가지 않는 성격 탓에 아버지가 사시는 아파트에서 5분 남짓 걸리는 동네 병원을 이용하셨다. 2주에 한 번 정도 간단한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아 약을 사 오는 정도였다. 그래도 지난 5월에 비하면 회복세가 완연했다. 의사가 전화를 건 것도 그런 진찰 과정 때였다.(200309)



<사진설명>
아버지가 30대를 보냈던 시골 마을입구의 전경.  나무는 사람보다 오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