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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자전거의 짝사랑

높새, 비내리는 이틀밤의 외박



뭐? 내가 외박을 좋아하냐구? 그렇지 않음 어떻게 이틀이나 외박하냐구? 그것도 비까지 내리는 날 노상에서? 
글쎄! 그러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니까! 아마도 내 얘길 들어보면 이해하게 될 거야. 

지난 금요일 아침, 내 주인 노을이가  나를 타고 출근
할 때만 해도 외박은 생각도 못했지. 노을이도 그랬던 것 같고, 아마 노을이가 외박을 생각했다면 건물 지하주차장에 날 세웠을 거야. 그런데 금요일 아침 노을이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건물 밖 1층 자전거거치대에 세웠거든. 더욱이 이날은 낮에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대개 이렇게 주차하는 이유는 저녁에 날 데리고 퇴근하겠다는 의미거든. 지하주차장으로 찾으러 가면 귀찮으니까 비를  좀 맞더라도 퇴근하기 편한 1층 거치대에 두는 거지. 

금요일은 예상한대로 비가 내렸지. 얼마쯤 있다간 해도 떴고, 또 어느새 비가 내리기도 했지. 다행히 저녁 6시 무렵에는 비가 개었어. 뭐 노을이야 보통 8시가 넘어 야간주행으로 퇴근하니 좀더 두고 봐야지만 말야. 

6시 무렵이었나? 갑자기 노을이가 나타난거야. 난 순간 앗싸! 하며 좋아했지. 비가 내리지 않는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노을이는 내게 오지 않고 눈길만 한번 주더니 날 지나쳐 버리는 거야. 대신 옆에 있던 어떤 여자에게 뭐라고 한 마디만 건네더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저녁을 함께 할 손님이 왔나보다 했어. 평상시처럼 저녁 8시가 넘어 퇴근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런데 8시가 넘어도 노을이는 소식이 없는거야. 9시, 10시, 11시. 이제 길도 깜깜해져서 오가는사람도 많지 않게 됐지.  나랑 함께 거치대에 있던 다른 자전거들은 모두 주인과 함께 돌아가 버린지 오래되었고. 오직 노을이만 나타나지 않는거야.  그때부터 난 오늘은 외박이 불가피하겠다고 봤어. 노을이는 술 마신 게 틀림없다 생각했거든. 

이럴거면  비도 맞지 않고 안전하기도 한 자하주차장에 두고 갈 것이지. 원망을 해보긴 했지만 별 수 없었어.  할 수 없이 금요일엔 노상에서 외박하게 되었는데, 이건 완전 노숙인거야. 거리는 깜깜하지.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지. 거기에 비까지 내리지. 나를 지키는 것이라곤 은행건물 안에 설치된 CCTV 하나뿐이었어.  CCTV는 혹 누가 날 데려간다면 그 범인을 잡는데나 유용할 뿐이라 사실 내겐 큰 의미도 없지. 

토요일이 되었는데도 비는 오락가락했어. 비록 휴일이긴 하지만 난 노을이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  아마도 비속에 외박시킨 걸 몹시 미안해 할테니까. 3년 전에 나를 구입해서 '높새'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걸 보면 알 수 있잖아. 더욱이 그동안 나랑 함께 달린 길이 얼마나 많은데. 

오전 10시, 11시. 뭐 좀 이르잖아. 휴일인데 노을이도 좀 푹 쉬어야지. 오후 3시, 4시. 아마 지금쯤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고 있을거야. 그래도 좀 서운한 걸. 줄근했다면 날 먼저 봐야지. 저녁 7시, 8시. 뭐야 토요일인데도 야근하는 건가?  밤 10시, 11시. 출근 안 한 건가? 그럼 오늘도 나 혼자 노숙하라고? 

맞아. 토요일 저녁에도 노을이는 오지 않았어. 사무실도 들르지 않은 모양이야. 애정이 식었나? 내가 듣기론 노을이가 이렇개 길가에 세워두었다가 잃어버린 자전거가 두세 대쯤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젠 나도 버리겠다는 심사인가? 

그때부터 서운해지기 시작했지. 밤에도 비는 오락가락 내렸고, 이제 한 곳에서 이틀을 서 있으니 누군가 날 훔쳐가려고 노릴 가능성도 많아졌
지. 실은 채워진 자물쇠도 그리 튼튼하진 못해 누군가 맘만 먹은다면 쉽게 날 가져갈 수 있을텐데. 그걸 잘 알고 있는 노을이가 나를 이틀이나 노숙시키다니. 토요일 밤은 더욱 힘들었어. 무서움에 외로움까지 밀려들었으니까. 

다행히 두 번째 밤도 무탈하게 지냈어. 밤새 비맞은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몸에 상처하나 없이 있다는 게 다행이지. 그런데 문제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거야. 휴일에 노을이가 사무실을 나올지 무척 걱정스러웠지. 오늘도 오지 않는다면 사흘째 비를 맞으며 노숙하게 될텐데. 

오전 11시 노을이가 불쑥 나타났어. 난 무척 반가웠지만, 이틀간 노숙시킨 것에 뿔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노을이는 내게 오더니 외모를 쓱 한번 보고는 곧 열쇠를 풀었어. 아직 내 몸엔 물기가 남아있었지만 아랑곳없이 나를 끌고 갔어. 잠시 후 노을이는 나를 사무실까지 데려갔어. 일하러 왔는데, 이틀간 방치한 내가 걱정스러워 나를 먼저 챙긴 모양이야. 

지금 난 사무실에 있어. 노을이는 저만치 제 자리에서 뭔가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고. 밖은 여전히 해가 떴다, 구름이 짙게 깔리기를 반복하고 있어. 언제 비가 내릴지 알 수 없겠어. 지금은 비가 와도 상관없는데 노을이가 퇴근할 무렵엔 비가 그쳤으면 좋겠어. 그래냐 노을이랑 함께 퇴근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뭐 그리 자존심도 없냐고? 이틀이나 방치한 주인에게 화도 못 내고,  곧바로 고개를 숙이냐고? 자존심, 있지!  자존심은 내 존재감이 먼저 들어야 더욱 강하게 생기잖아. 난 달리는 물건이야. 달려야 내 존재감이 생겨. 그러자면 노을이와 함께 해야해. 다른 사람이 날 탈 수도 있지만, 그동안 노을이랑 호흡을 맞춘 게 얼만데. 꿈은 많은 사람과 꿀 때 현실이 된다지만, 난 더디더라도 좋은 사람과 꿈을 꾸고 싶어. 그래야 멋진 꿈이 되잖아.

비록 이틀간의 노숙이 힘들긴 했지만, 다시 기회가 오면 노을이는 나랑 함께 달릴거야. 그때야 비로소 내 존재감이 살고 자존심도 살거든. 아직 노을이에게 그만큼의 믿음은 있어. 봐 지금 들리는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 분명히 내 얘길 쓰고 있을거야.(201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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