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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자전거의 짝사랑

존재를 인정받는 신호



10월 17일 아침 6시 30분, 높새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가 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인근은 안개로 자욱했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의 사이로 벌판들 낸 곳이라 달리 피할 도리가 없는 지형이었다. 

높새를 타고 안개속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19번 국도가 나타났다. 섬진강변을 따라 난 왕복 2차선길. 안개는 겨우 100미터 앞 정도를 볼 수 있을 듯 싶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높새는 19번 국도로 달렸다. 

목적지는 화엄사입구다. 숙소에서는 10킬로 정도 될 듯한 거리다. 행사의 일환으로 떠난 여행에 애초 자전거도 동행할 생각은 없었다. 여행 당일 아침 사무실에 자전거를 타고 들렀다가, 출발지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 막상 둘 곳이 마땅 찮아 버스에 싣게 된 것이다.  내친 김에 숙소가 친근한 구례라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 높새와 나서게 되었다. 

문제는  안개였다. 안개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구례의 아침길을 두어 번 달려본 경험에서도 안개는 없었다. 높새에겐 안전을 보호할 불빛이 없었다. 그저 노을이가 입은 노란색 외투가 전부였다. 다행히 화엄사 방향으로 가는 동안 차들은 별로 없었다. 높새 역시 차선 안으로 드는 대신 갓길을 택했다. 
화엄사 입구에 도착해 방향을 틀었다. 예상보다는 빠른 시간에 도착했다. 8시에 아침식사를 한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화엄사입구에서 구례입구까지는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오를 때 썼던 힘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구례입구에서 속소쪽으로 난 19번 도로를 다시 접어 들었다. 그 무렵에  안개속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길거리에 조그만 수례를 세워두고는 뭔가를 걷어들이고 있었다.아마도 콩이나 호박을 걷어내는 것 아닌가 싶었다. 도로 옆으로 차들이 제법 달렸다. 경계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알 수 없을 듯한 안개속에서도 한 촌로의 아침은 이미 한참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19번 도로는 비교적 붐볐다. 하동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높새를 경계했다. 저 멀리서부터 경보음을 울렸다. 백밀러를 통해 뒤를 확인하는 일도 잦아졌다. 여전히 높새는 차선 밖 갓길을 달렸지만, 그렇디고 차들이 경계를 풀 이유는 되지 못했다. 

평상시에 차들이 경보음을 울리면 기분이 살짝 나쁘곤 했다. 도로에서 자전거의 존재도 인정하길바라는 이로서, 그 소리는 마치 '자전거는 나가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 낀 19번 도로에서 차들의 경보음을 듣는 건 반가웠다. 차들이 높새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신호음으로 들렸다. 서로가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상상을 좀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90분 남짓한 구례의 안개속을 달린 자전거여행. 예상하지 않았지만 만난 인연처럼 산뜻했다. 도로가에서 안개를 줍던 할 할머니의 아침을 얻었다. 한 때의 안전을 우려했던 이가, 일상의 안전을 위협받고 사는 이를 만난 것이다.  이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할머니에게도 경보음을 부단히 내길 바란다. 존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그 신호음으로.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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